[한일관계사] 러일전쟁~한일합방조약의 시기에 대해서
- 최초 등록일
- 2004.07.27
- 최종 저작일
- 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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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레포트로 제출했었던 건데요
점수도 나쁘게 받진 않았어요
필요하시면 받으세요~^^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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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러일전쟁~한일합방조약의 시기에 대해서
사건 중심으로 전체적인 한일관계 정리하기
유럽 각국은 제국주의 정책을 펼쳐 나가기 위해 각국에 요새지 항만을 모색, 그것을 거점으로 하여 광산 등 채득권을 손에 넣었다. 1898년 독일은 코슈만, 영국은 큐류도, 다음해에는 프랑스가 코슈만을 손에 넣고 러시아는 1898년 여순, 대연을 점거하고 특히 러시아는 철도 부지권을 대련까지 획득했다. 이때 일본은 대외적으로 위기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열강의 중국분할에 대해 중국 민중은 후신메쯔요(부청멸양)를 슬로건으로 의화단을 중심으로 항거했다. 이 난이 북경, 천진까지 접근해 옴에 따라 각국의 연합군이 조직되어 출병하여 북경을 점령해서 난을 수습했다. 이 난을 북청사변이라 한다. 이 사건은 1900년에 북경, 천진에서 일어났다. 이때 출병군은 영, 미, 프, 러, 일 등 8개국이었다. 일본은 2만2천명이 출병했고, 그 결과 일본은 출병 각국과 함께 보상금과 군대의 북경상주권을 얻었다.
이 무렵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컸다. 러시아는 북청사변 후 점령한 만주에서 여전히 철퇴하지 않고 만주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즉, 만주를 사실상 점령하여 남진정책을 노골화했다. 청일전쟁 후의 3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돌려준 일본으로서는 한국의 권익마저 위태롭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러시아에 대한 정책을 제고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정부 내에서는, 만주를 러시아, 한국을 일본의 세력범위로 하는 만한교환으로 러시아의 협조를 구하는 이토 히로부미 등의 러일협상론과, 한국과 만주에서 러시아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영국과의 연합을 추구하는 야마가타아리도모와 카쯔라타로, 코무라쥬타로 등의 영일동맹론으로 의견이 나누어졌다. 그러나 후자가 다수이고 영국도 일본의 군사력을 이용해 러시아에 대항하려는 입장을 취하여 일영간의 교섭은 예상했던바 이상으로 빨리 진전되어 1902년에 영일동맹이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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