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과 조선인민공화국
- 최초 등록일
- 2015.10.16
- 최종 저작일
- 20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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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조선건국동맹
Ⅲ. 해방정국과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
Ⅳ. 조선인민공화국의 탄생과 좌절
Ⅴ.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해방이 되자 일제의 탄압으로 그동안 금지 당했던 정치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정책으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출할 수 없었던 한민족은 해방으로 정치공간이 열리자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리고 이념에 따라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해방 직후 정치활동을 전개한 주요 정치세력으로는 김성수 ∙ 송진우를 중심으로 한 우익 민족주의 세력,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세력,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세력, 기독교계 인사를 중심으로 한 종교 세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은 해방과 함께 해외 즉 중국 ∙ 소련 ∙ 미국으로부터 입국한 정치세력과 이합집산하면서 서로 경쟁하였다. 이들 정치세력 상호간에는 국가건설의 기본방침이 달랐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대립하고 투쟁하였다. 여기에 외적 요인으로 미국과 소련이라는 매개변수가 작용하여 갈등은 한층 더 극대화되었다. 이들 중에서 해방과 함께 가장 먼저 조직화된 것이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였다.
Ⅱ. 조선건국동맹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압송된 후 형을 살고 그대로 국내에 머물렀던 여운형은 자신을 쟝 졔스정부와의 화평교섭사절로 보내려는 일본정부 쪽의 초청으로 도쿄에 갔다(1940). 화평사절은 성사되지 않았으나 그곳 지도급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일본의 실정을 파악했다. 한편 중국의 연안 ∙ 북경 ∙ 만주 등지에 있던 이영선 ∙ 최근우 등과의 연락을 통해 일제의 패망을 예견할 수 있었다. 여운형은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인 1942년 4월부터 8월까지 두 차례 일본 도쿄를 방문하여 미군기의 최초 도쿄공습을 직접 목격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의 패망이 목전에 도래했음을 확신하게 되었고, 일제 패망에 대비할 활동을 계획하는 한편, '일제의 패망=조선의 독립'이라는 논리에 근거해 건국준비작업을 세웠다.
참고 자료
『한국사 52권』, 국사편찬위원회, 2003
『고쳐 쓴 한국현대사』, 강만길,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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