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상사 논문요약 - 신라 하대 불교
- 최초 등록일
- 2014.11.08
- 최종 저작일
- 2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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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0. 요약대상 논문
1. 선종 산문 성립 이전의 상황
2. 초기의 선종
3. 선종 산문의 성립
4. 선종 산문의 기반
5.결론
본문내용
최병헌. <신라하대 선종구산파의 성립 - 최치원의 사산비명을 중심으로 ->. <<한국사연구>> 7. 한국사연구회, 1972. (이하 최)
조범환. <신라 하대 서남지역의 선종산문 형성과 발전>. <<진단학보>> 100. 서울: 진단학회, 2005. (이하 조)
구산우. <신라말 고려초 김해 창원지역의 호족과 봉림산문>. <<한국중세사연구>>25. 한국중세사학회, 2008. (이하 구)
1. 선종 산문 성립 이전의 상황
최: 최치원이 구분한 신라 불교의 시기는 신라의 정치사적 구분과 그 시기가 대개 일치한다. 이는 정치세력이나 사회의 변화에 상응하는 관념의 변화가 따르는 것을 나타낸다. 신라 중대의 불교는 교학불교로 화엄이 대표적인데 화엄 사상은 그 사회적 기반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귀족불교로써의 화엄은 백성들과 거리가 더욱 멀어지며 공허한 이론에 빠져들었고 전제왕권의 성장도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 왕권이 무너지고 6두품이 등장하는 사회적 배경과, 불교 자체의 모순 발견하고 이 모순을 자체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불교적 수준이 마련되어 있는 사상적 배경 위에 禪宗이 새로운 사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조: 서남해안 지방에는 적잖은 해적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해적들은 중앙으로 공급되는 곡물이나 생산물들을 약탈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청해진의 설치는 큰 영향을 미쳐 해적의 활동이 거의 그치게 되었다. 당시의 사찰은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어 도적들의 약탈 대상이 되었는데,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는 이들의 발호를 억누르는 역할을 하였다.
구: 김해와 창원은 독립된 행정구역이지만 인접 지역으로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부분이 많다. 봉림산문은 이 지역에서 존재하였던 선종 산문으로 이를 이해하려면 지역사의 관점에서 조망해 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김해와 창원지역의 호족세력들이 세력 근거지로 삼은 성곽은 進禮城과 金官城이었다. 진례성은 현재 창원시 비음산에 있는 진례산성으로 비정되고, 금관성은 김해시 분산의 분산성으로 비정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