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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1930년대 초 당재건 운동
Ⅲ. 이재유 그룹의 당재건 운동
1) 이재유, 운동의 시작
2) 이재유 그룹의 형성과 활동
① 경성트로이카 시기 - 1기
② 경성재건그룹 시기 - 2기
③ 경성재건그룹 시기 - 3기
Ⅳ. 이재유 이후의 당재건 운동
1) 경성콩그룹
① 경성콩그룹의 조직과 활동
② 경성콩그룹의 정치방침과 조직운영
Ⅴ.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한계와 의의
Ⅵ.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이 구절은 김남주 시인의 시 ‘전사 2’ 중의 일부이다. 김남주는 누굴 위하여 이 시를 지었을까? 민족대표 33인을 위한 것인가? 아닐 것이다. 분명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게 죽어간 운동가들을 위해 지은 시일 것이다. 이렇게 오늘 우리가 볼 내용은 일제에 의해 한번 죽고, 반공 체제의 우리정부에 의해 두 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그들의 운동을 알아보고자 한다. 과연 만세운동이나 민족주의계열들의 항일투쟁만이 우리나라 해방 운동의 전부였을까? 해방 운동에는 사회주의 운동도 당당히 들어갈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중 략>
경성형무소에서 출감한 이후 이재유는 김삼룡, 안병춘, 이순금 등 이른바 경성트로이카의 핵심 성원들은 물론이고, 유진희, 남만희, 유순희 등 다수의 운동자들과 폭넓게 의견을 교환한 것을 바탕으로 정세 판단과 운동방침의 수립에 몰두했다. 계속되는 경찰의 감시를 따돌리기 위해 이재유는 지하로 잠복하여 지하의 비합법 운동을 선택한다.
이재유는 운동의 중점을 노동자계급의 조직화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 제시한 것은, 조직은 파업이나 맹휴 등의 혁명적 투쟁을 통해 결성되어야 한다는 것과 아울러 이는 어디까지나 한 지방의 단일적 조직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 략>
‘이재유그룹’ 사건으로 일제의 수배를 받아오던 이관술은, 이순금과 연락을 취하며 재기를 모색해 오다가 1938년 12월 말경 그녀의 소개로 강경자를 만났다. 그리고 1939년 3월 말경 이순금의 소개로 김단야를 만나 소련의 정세에 대해 교양을 받았다. 한편, 이관술과 같은 사건으로 징역 2년의 형기를 마치고 고향에 있던 김삼룡은, 1938년 12월 중순부터 1939년 1월 하순 사이에 수원에 거주하는 ‘김석X’라는 사람을 만나고 재차 실천운동에 투신할 것을 제안 받았다. 이후 김삼룡은 본격적인 실천활동을 위해 경성에 상경하여, 1939년 4월 3일경 효창공원에서 ‘김석X’로부터 35,6세 가량의 지도자를 소개받는다. 김삼룡과 이 지도자는, 1939년 7월 중순경까지 1~2주에 1회씩 정기적인 가두연락을 하면서 다양한 문제를 협의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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