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 회군은 올바른 결정이었다. 긍정과 부정 입론
- 최초 등록일
- 2013.05.14
- 최종 저작일
- 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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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논제
2. 논의배경
3. 용어정리
4. 쟁점
본문내용
논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올바른 결정이다
논의배경
명의 주원장은 1387년 원이 세운 쌍성총관부를 들어 철령 이북 땅에 철령위를 세운다고 통보함으로써 친원세력인 고려의 우왕과 최영을 자극하게 되었습니다. 우왕과 최영은 1388년 요동정벌을 단행하게 됩니다. 이때 친명 세력인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반대하지만 조민수와 요동정벌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성계와 조민수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으로 돌아와 우왕과 최영을 몰아내게 되면서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위화도회군은 지금도 많은 사학자들에 의해서 그 정당성에 대해서 논의되고 있는 주제로써 저희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 올바른 결정인지 논의해 보고자 합니다.
용어정리
위화도 회군: 고려 말기인 1388년에 요동정벌군의 장수였던 이성계, 조민수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정변(政變)을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부정팈
주장
위화도 회군은 쿠테타이다
근거
이성계는 1388년 우왕의 명으로 요동정벌이라는 원정을 떠나게 됩니다. 4대 불가론을 주장하며 출병의 부당함을 주장하였으나 최영장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나아가 요동을 공격할 수도 없고 물러서자니 왕명을 거역하였다는 죄명을 뒤집어 쓸 것이 뻔한 상황이었기에 군사를 되돌려 조민수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게 됩니다.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돌아와 우왕과 최영을 몰아내고 조정을 장악하게 되며 창왕을 차기왕으로 옹립하지만 최영의 일파였던 김저가 우왕의 밀지를 받아 이성계를 살해하려는 사건이 발생하자 폐가입진(弊家立眞)을 구실 삼아 공양왕을 옹립했습니다. 그러던 중 1392년 공양왕마저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이 되면서 국호도 조선으로 바꾸게 됩니다. 이성계가 백성을 걱정하고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회군을 단행했다면, 4년 만에 왕조를 뒤집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힘을 가졌다고 신이 군을 반역한다는 것은 잘못된 점입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