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남아프리카공화국)의 기본정보, 남아공(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 남아공(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회구조,노동운동, 남아공(남아프리카공화국) 수산업,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정책)
- 최초 등록일
- 2013.04.15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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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남아공(남아프리카공화국)의 기본정보
Ⅲ. 남아공(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
Ⅳ. 남아공(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회구조
Ⅴ. 남아공(남아프리카공화국)의 노동운동
Ⅵ. 남아공(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산업
Ⅶ. 남아공(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정책)
Ⅷ.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콩고분지조약의 발효에 따라서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서구 제국은 대(對) 아프리카 정책에서 두 가지 경향을 명백히 하기 시작하였다. 첫째는 특허회사에 의한 경제적 이익의 추구였고, 둘째는 실질적인 식민지 지배를 확립하기 위하여 무력에 의한 분할의 촉진이었다.
콩고분지조약은 식민지주의국(植民地主義國)에 대해 경제적 이익의 독점을 금하고 기회균등과 문호개방의 원칙을 강요하였다. 이 제약을 벗어나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서 1885∼1900년에 걸쳐 식민지주의 제국은 똑같이 특허회사를 설립하였다. 특허회사는 식민지 내에서 자원이 풍부한 지역에 대한 토지소유권·광업권·무역의 권리 등에 관한 독점적 권리를 부여받았을 뿐만 아니라 징세권(徵稅權)을 비롯하여 행정·사법·입법 및 경찰의 권리까지 보유하면서 이 권리를 배타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영국의 특허회사는 산업자본가의 발언권이 강하고 자본주의적인 자원개발을 추진한 데 비해, 프랑스나 벨기에의 특허회사는 상업자본가나 봉건적 지배층의 의도에 따라 경영됨으로써 확대재생산을 꾀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강제 노동이나 강제재배에 의한 약탈적인 착취를 일삼았다. 따라서 아프리카는 종래의 노예무역을 대신하여 원자재 등의 국제 상품과 서구 공업제품의 부등가교환(不等價交換)을 강요당하였다.
한편 콩고분지조약은 식민지 영유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요건(要件)으로서 실질적인 점령과 지배 상태를 명시할 것을 식민주의 국가에 요구하였다. 때문에 차드호(湖)를 목표로 한 영국·프랑스·독일의 군대 파견 전쟁이나, 수단을 점령하려는 영국·프랑스군의 충돌(파쇼다사건) 등의 분할경쟁이 진행되었다. 남부 아프리카의 네덜란드계(系) 보어인(지금의 아프리카너) 공화국 내에서 다이아몬드나 금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영국의 침략이 시작되고 1899∼1902년 사이에는 보어전쟁이 계속되었다. 또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통합 지배하려 한 포르투갈, 남서 아프리카와 동부 아프리카(지금의 탄자니아)를 연결하려는 독일, 게다가 케이프타운에서 카이로까지 식민지를 연속시키려고 하는 영국 등이 대립하여 콩고 분지 이남의 내륙에서 분할경쟁을 벌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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