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기(일제강점기,식민지시대)의 친일파, 일제시기(일제강점기,식민지시대)의 문화정치, 일제시기(일제강점기,식민지시대) 관세제도, 일제시기(일제강점기,식민지시대) 대한민국임시정부
- 최초 등록일
- 2013.04.12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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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일제시기(일제강점기, 식민지시대)의 친일파
Ⅱ. 일제시기(일제강점기, 식민지시대)의 문화정치
Ⅲ. 일제시기(일제강점기, 식민지시대)의 관세제도
Ⅳ. 일제시기(일제강점기, 식민지시대)의 과학기술자
Ⅴ. 일제시기(일제강점기, 식민지시대)의 방송통제
Ⅵ. 일제시기(일제강점기, 식민지시대)의 공업교육
Ⅶ. 일제시기(일제강점기, 식민지시대)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본문내용
Ⅰ. 일제시기(일제강점기, 식민지시대)의 친일파
1. 3.1 운동 무렵의 친일파
-친일파에게 귀족 신분을 배급
1910년 6월부터 나남, 청진, 함흥, 대구의 일본군들이 한밤중 남의 눈에 뜨이지 않는 길을 통해서 서울로 진입해 왔다. 이들 응원 병력과 용산 주둔 일본군 제2사단의 철통같은 경비망 속에서 8월 22일, 나라와 백성을 팔아넘기는 병합조약이 조인되었다.
이 일을 주동적으로 수행한 이완용·박제순·송병준 이하 76명에게 논공행상으로 ,혹은 회유를 위해서 일제는 귀족의 신분을 배급했다. 후작(Marquis) 6명, 백작(Count) 3명, 자작(Viscount) 22명, 남작(Baron) 45명인데 김석진 등 8명이 남작의 수령을 거절했다. 이후 1920년대로 들면서는 이완용이 백작에서 후작으로, 고희경과 송병준이 자작에서 백작으로 승급사고 이완용의 차남인 이항구에게 추가로 남작이 수여된다. 이리하여 작위를 받은 최종 숫자는 후작 7명, 백작 4명, 자작 20명, 남작 38명으로 총원 69명이 되었던 것이다.
이 69명 중 김가진(남작), 김사준(남작), 김윤식(자작), 이용직(자작), 이용태(남작)가 독립운동을 하다 작위를 잃었다. 남은 64명 중 민영린(백작), 윤택영(후작), 조민희(자작)가 파산 또는 품위 실추로 작위를 잃는다. 조희연은 사후에 남작을 반납했다. 윤웅렬의 남작은 장남 윤치로가 상속했으나, 총독 암살 음모라는 날조된 죄-105인 사건-를 덮어씀으로써 1913년 10월에 박탈을 당한다. 남은 59석이 대체로 무사하게 일제 말엽까지 물려졌는데, 내역은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17명, 남작 33명이다.
이 부류 일제의 귀족 계층은 3.1운동에까지 등을 돌렸다. 만세 봉기가 나자 이완용은 [매일 신보].[경성 일보]에 전후 3차의 배역 담화를 발표했다. 가라사대 3.1운동은 "사리를 분별치 못하고 나라의 정세를 알지 못하는 자의 경거망동이다. 그들의 망동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는 것일 뿐"이며, 조선인의 행복은 대일 투쟁이 아닐 실력의 양성에서만 찾아질 수 있다는 타령이었다.
참고 자료
강진호 - 조선어독본과 일제의 문화정치, 상허학회, 2010
김태동 외 1명 - 일제하 조선의 관세제도에 관한 연구, 상주대학교, 1992
김근배 - 식민지시기 과학기술자의 성장과 제약, 한국역사연구회, 1998
박수현 외 3명 - 일제의 친일파 육성과 반민족 세력,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최병갑 - 일제시기 공업교육정책에 관한 연구, 강원대학교, 1997
황유성 - 일제 및 미 군정기 방송의 특성에 관한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