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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등록일
- 2013.04.11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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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흑도회의 결성내용
Ⅲ. 흑도회의 결성과정
Ⅳ. 흑도회의 활동
Ⅴ. 흑도회와 흑도
Ⅵ.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은 초기의 유학생 중심의 운동에서 점차 모든 계층을 망라한 운동으로 발전했다. 재일조선인들은 국내보다 나은 노동조건과 학업을 위해 도일을 한 후 식민지라는 구조적인 모순을 절감하고 이의 철폐를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투쟁했다. 재일조선인의 운동을 조직적이고 지속적, 투쟁적으로 이끈 중심세력은 사회주의를 견지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사회주의가 갖는 이론적인 측면에 동감했다기보다는 식민지해방에 적합한 사조로 판단하고 수용, 보급했다. 이러한 운동의 주도세력이 갖는 지향성과 노동자 대중의 실천력이 일치함으로써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은 일본의 사회운동세력이 탄압시기를 맞아 힘을 잃고 운동전선에서
<중 략>
일본 제국주의 한복판에서 조선인에 의해 전개된 최초의 의열투쟁은 1920년 4월 28일 徐相漢의 폭탄투척의거였다. 당시 일본 유학생이었던 徐相漢은 일제의 강제 정략결혼에 반대해 일본 왕족들과 친일인사들이 참석한 자리에 폭탄을 던지려다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의열투쟁은 1921년 2월 國民協會長 閔元植을 처단한 梁根煥 의거로 이어졌다. 인력거를 끌며 고학하던 梁根煥은 조선에서의 의회개설과 관리임용 등 자치제 시행을 청원하는 國民協會의 활동소식을 전해 듣고 분개하였다. 그는 東京의 국제호텔로 민원식을 찾아가 설득하려 했으나, 응하지 않자 단도로 처단하였다.
<중 략>
특히 전 회원이 참여했을 창간사와 선언문에서는 스스로 ‘철저한 자아주의자들’임을 밝힌 동시에 ‘상호부조’를 강조하였다. 또 일본 사회주의자들의 관심과 유대를 호소하면서 기고와 광고를 통해 이를 적극 반영하였다.
Ⅵ. 결론
단체는 자신들이 견지하는 사상을 보급하는데 주력하는데 급급하여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을 주도할 정도의 역량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 구체적인 민족운동의 움직임은 2.8독립운동 외에는 전무한 상태였다. 그러나 초보적인 단계이기는 하였지만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계층을 초월해서 결속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의 토양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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