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과 남한산성 탐방 및 조사 프레젠테이션
- 최초 등록일
- 2012.02.02
- 최종 저작일
-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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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병자호란에 대한 역사를 3~4p정도에 걸쳐 소개하고,
직접 방문하여 여러 유적과 산성, 터등을 사진을 찍어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었습니다.
발표자료에 사진과 같이 설명할 자료를 첨부하였고,
병자호란은 한페이지씩 넘기면 되며, 남한산성 발표때는 커다란 지도에 화살표로 표시된 곳을 클릭하면
그 사진으로 이동합니다.
약 30p 정도의 분량이나, 사진으로 거의 이루어졌기에 설명의 양에따라 발표시간을 조절할수있습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삼전도비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전승비(戰勝碑).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쪽 면에는 한문, 다른쪽 면에는 만주문(滿洲文)·몽골문으로 번역되어, 비석 하나에 3개국 문자를 사용하였다. 또한 비 머리의 이수(螭首), 받침돌의 귀부(龜趺) 조각도 정교하여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정교한 조각의 하나로 꼽힌다.
삼배구고두
삼배구고(三拜九叩)라고도 한다. 궤(跪)는 무릎을 꿇는 것이고, 고(叩)는 머리를 땅에 닿게 한다는 뜻으로,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이기를 3번, 이것을 한 단위로 3번 되풀이하였다. 고두(叩頭)의 예는 청나라 이전부터 있었으나, 청대에 들어와서 1궤 3고·2궤 6고·3궤 9고 등으로 제도화하고, 외국 사절에게도 강요하였다.
수어청
조선후기 5군영(五軍營) 가운데 하나로 1626년(인조 4) 서울 동남쪽의 방어선인 남한산성을 개축하고 이 일대의 방어를 위해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경기병사겸 총융사가 관할하였으나 병자호란 이후 군영으로 독립하여 수어사(守禦使)를 두었다.
참고 자료
없음
압축파일 내 파일목록
발표자료.hwp
병자호란과 남한산성.ppt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