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화쟁사상 제출[1]
- 최초 등록일
- 2011.12.02
- 최종 저작일
- 2008.04
- 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소개글
원효의 화쟁사상입니다
짜임새 있게 작성하여 교수님 극찬하신 자료입니다.
목차
1. 원효의 생애와 저술
2. 원효의 화쟁사상
3. 화쟁의 논리
(1) 개합(開合)과 종요(宗要)의 논리
(2) 입파(立破)와 여탈(與奪)의 논리
(3) 동이(同異)와 유무(有無)의 논리
(4) 이변비중(離邊非中)의 논리
4. 마무리
본문내용
1. 원효의 생애와 저술
원효(元曉, 617~686)는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불멸의 금자탑을 쌓은 위대한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다. 원효는 신라 진평왕 39년에 압량군 불지촌, 오늘날의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고, 성은 설(薛)이며 어렸을 때 이름은 서당(誓幢)이라고 했다. 그 의미는 첫새벽을 뜻하는데, 불교를 처음으로 빛나게 하였다는 의미를 지닌다. 원효는 불명(佛名)이고 고려 숙종 때 화쟁국사(和諍國師)의 시호를 받았다. 그의 저술은 100여종 240여권(또는 99부 200여권)으로 알려져 있으나, 오늘날 19부 22권만이 전해진다.
젊은 날의 원효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가 남긴 다양한 저술들을 통해 볼 때, 불교학은 물론 유가와 도가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학문을 닦는 한편 수행자로서 간절하고 피나는 고행을 다했던 것 같다. 또한, 그에게는 일정한 스승이 없었고, 오직 진리를 따를 뿐이었다. 이와 같은 학문적 배경은 그를 열린 마음으로 이끌어 사상의 폭을 넓혀 주었다. 그리고 어느 특정한 종파의 견해에 떨어지지 않고 다양한 논쟁이나 주장들을 모두 받아들여 하나로 화해시킬 수 있는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
원효는 44세 때(661년) 의상과 함께, 고구려를 통해 입당유학 길에 오르던 중, 첩자로 오인 받아 잡혀 있다가 신라로 되돌아온다. 이 과정에서 토굴 안에서의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마음이 생긴즉 모든 것이 생기고 마음이 멸한 즉 해골바가지와 내가 둘이 아니다”라고 읊었다고 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