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학] 고려 내투 발해류민의 위상과 사회적 영향
- 최초 등록일
- 2002.10.08
- 최종 저작일
- 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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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인구이동에 대한 검토
3. 발해의 멸망과 발해유민의 고려내투
1) 10세기 초반의 동북아시아 정세와 발해유민의 동향
2) 발해유민의 사회적 영향
4. 발해부흥 운동기의 발해유민의 고려내투
1) 발해의 부흥운동과 발해유민의 동향
2) 발해유민과 그 후예의 사회적 영향
5. 맺음말
본문내용
고려사회 내에서의 발해유민의 영향
《高麗史》에 기록된 발해유민 자료는 매우 소략한 편입니다. 발해유민에 대한 열전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사료에 등장하는 인물도 내투한 사실을 밝히는 단편적인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遼史》의 기록에서도 발해유민이라 여겨지는 인물들의 행적이 간간이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사료의 부족 속에서 발해유민의 사회적 영향을 고찰해본다는 것은 논리 전개에 있어서 다소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비록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사료이지만 이 사료들을 종합해보면 대략적인 흐름에 대해서는 파악이 가능하였습니다. 기록되어 있는 내투 발해유민이나 발해유민의 후예들은 거의 일률적으로 무인의 성격이 강하고 거란, 몽고와의 전쟁을 기화로 해서 軍功을 세운 활동가들이었습니다. 이런 점은 고려사회에 있어서 경주 출신 세력들이 중앙정계에서 활동하였던 것과 비교되는 사실이었습니다. 발해유민의 군사적인 면에서의 활동은 遼로 강제 이동된 발해유민의 활동과 金初의 발해유민의 행적에서도 확인될 수 있었습니다. 한편 遼로 이주한 발해유민의 행적에서는 군사적인 활동이외에 제철, 병기제작, 기와생산 등 생산기술면에서의 활동도 눈에 띄는데 고려로 내투한 발해유민의 행적에서는 아직 생산기술면에서의 활동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물론 사료의 부족이 주원인이겠지만 遼보다는 당시 고려가 생산기술적인 면에서 더욱 선진적이었기 때문이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요와 고려의 생산활동 연구를 통하여 더욱 고찰해볼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