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역사 박물관 견학문- 정조의 홍재전서에 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9.05.02
- 최종 저작일
- 20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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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울 역사 박물관을 견학하고 쓴 감상문입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여러 유물들 중에서 정조의 시문집인 `홍재전서`에 대해 초점을 맞춘 레포트로, 한국사나 교양 수업을 듣는 분들께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첫째,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교수님께서도 강의시간에 언 듯 말씀하신바와 같이 주자성리학의 이데올로기를 바꿔놓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노론 경세학파(북학파)나 남인 경세학파(서학파), 소론 양명학파(강화학파) 같은 세력들을 주체세력으로 통합하거나 새로운 기반세력으로 결집시키지 못했다. 이들의 정치적 진출과 성장을 막으려는 특권세력 중에는 영조연간 형성된 신흥 문벌양반인 외척당 출신은 제거했으나 오랜 전통을 가진 문벌양반 출신들을 결정적으로 약화 시켜놓지는 못한 것이다. 이들을 온건하게 변화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훗날 이 세력 중에서 개혁을 뒤엎는 세력이 나오게 된 것이다.
둘째, 영조는 도성수비체제 강화와 균역법 실시로 안정적인 군체계를 확보했는데, 정조는 또다시 적극적인 군제개혁과 수원성 건설을 추진함으로써 외척을 비롯한 경화벌열들의 의구심을 산 것이 문제였다. 특히 군제개혁의 경우 시험을 통해 일반 백성들을 선발했다. 예를 들어 군관을 뽑을 때 한번 시험을 보면 1만 명 정도를 뽑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이를 보통 만과라고 이야기했다. 이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장용영을 중심으로 배치했는데. 합격자들은 사대부 출신이 아니라 대개 평민 상층이라든지 중간계층이었다. 따라서 이들을 제대로 조직 했더라면 정조의 강력한 개혁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장용영은 정조가 유일하계 일반 백성을 조직화 시키려고 했고, 어느 정도 조직화에 성공했던 기구였다. 그러나 이를 실제로 개혁에 활용하지 못했기 때들에 사실상 별 의미가 없게 되었다.
셋째, 백성과 군주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을 꾸준하게 실시하여 실제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불행히도 이것이 특권층을 견제하는 정도의 의미에서 끝난 점이다. 교화 군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일반민에 대한 대동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는 점도 높이 평가되지만, 이 역시 이들을 군주 친위세력으로 정치집단화하지 못하고 특권층을 견제하는 정도, 특히 특권층의 비리를 강력히 견제하는 수준에 그쳤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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