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진주성의 전투와 의기 논개

등록일 2000.09.12 한글 (hwp) | 6페이지 | 가격 1,000원

목차

1. 서론
2. 제1차 진주성싸움
3. 제2차 진주성싸움
4. 논개의 순국사실
5. 의기 논개의 비와 사당의 건립
6. 논개에 대한 다양한 논의
7.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지리산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의 지류가 되는 남강 사이로 시가지가 만들어진 진주에 들어서면 도심 사이로 성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진주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많겠지만 그 중에서도 논개(論介)가 먼저일 것이다. 우리는 조금 오래된 유행가 가사, 정비석 등 소설의 한 주제로 또는 드라마의 일부분으로 논개를 보아왔다. 그리고 논개가 단순히 한 여자의 몸으로 왜장을 껴안고 남강의 깊은 물줄기 사이로 뛰어 들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난세는 영웅을 만든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지나며 이순신장군, 권율장군 등 귀에 익은 많은 영웅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전국을 여행하다보면 이들을 기리는 사당이 간간히 눈에 띌 것이다. 하지만 이들 중에는 단순히 후손을 잘 만나 사당이 모셔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논개라는 인물은 후손을 잘 만났을리도 없고, 사대부의 여인으로 절개를 지킨 것도 아닐텐데 일개의 기생을 전라도 장수와 경상도 진주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임진왜란 당시에는 많은 의병장과 장군이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당시에 신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여유로운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나라를 지키고 나라를 위해 싸우는 일은 당연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논개는 단순한 개인이라기 보다는 진주성 싸움에서 죽어간 이름모를 민초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개의 여인이며, 더욱이 천대받던 기생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는 마음하나 만으로 목숨을 바친 논개의 의기는 가벼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데 본고에서는 논개를 낳은 진주성 싸움을 살펴보고, 이와 관련된 논개의 행적을 따라가보도록 하겠다.


Ⅱ. 제 1차 진주성 싸움

전쟁초기와 달리 전세가 부진해진 왜군은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조선군이 주둔하고 있는 진주성을 함락시켜 전세를 회복하고, 한반도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진공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가오카 타다오키 휘하의 2만여 명을 김해성(金海城)에 집결한 후 진주성을 향해 진군하게 된다.
당시 진주성을 지키던 사람들은 진주 목사 김시민(金詩敏)과 휘하 군사 3800명으로, 이러한 사태를 예상했던 김시민은 왜군과의 전투준비를 해놓았다. 특히 화기의 위력을 알고 있던 그는 각종 총통 70여 병을 새로 주조하여 요소에 배치하고 화약 510근을 준비하고 있던 상황 이었으며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조선시대 선조임금님 시절 이장손(李長孫) 발명한 화포의 폭탄
와 등의 화기를 만들어 준비하고 있었다.
왜군은 죽제(竹梯) 대나무 사다리
를 성벽에 걸고 기어오르려 했으며 3층 높이의 산태(山台)를 바퀴에 달아서 들어오며 조총과 화살을 성안에 퍼부었다. 그리고 소나무 가지와 짚더미 등으로 성호(城濠) 해자(垓字)로 성주위에 구덩이나 늪을 만들어 적의 치입에 대비해 놓은 시설물

를 메우며 달려 들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성계옥, 《진주 의암 발제지: 논개 추모 가무제》, 창작과 비평사
삼귀문화사, 《조선 전기 논문선집》, 삼귀문화사, 1999
정비석, 《명기 열전》, 고려원, 1989
한국사학논총, 《진주성 의기논개고》, 1986
박종화, 《임진왜란》, 1961, 을지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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