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1999년 7월 21일 대우그룹이 마침내 자금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정부와 금융권에 4조원 규모의 자금지원을 요청하면서 박정희 시대의 경제 패러다임은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박정희의 유신시대를 통해 거대재벌로 성장한 대우그룹이 결국 21세기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끝내 좌초하고 만 것은 그러한 사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제 박정희 시대의 경제관이라는 자체가 완전히 종언을 고했음을 웅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그러나, 박정희 시대의 이른바 “고도성장”이라는 신화가 너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일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와 유신 시대의 잔영에서 헤어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거기에 1997년 한국의 IMF이후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외환위기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피폐해진 경제상황, 더욱 넓어진 빈부격차, 실업, 그리고 생활고로 인해 그나마 “꿈을 심어주었다”고 느끼는 박정희와 유신시대의 경제에 대하여 향수를 느끼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박정희의 업적=경제성장" 이라고 할 정도로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냈다고 평가받는 박정희, 그가 경제성장의 도구로 사용했던 그의 모델들은 현대로 이르러 커다란 장애물로 변하여 현재의 경제성장에 해결해야 할 문제점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경제개발모델의 문제점을 고찰해 봄으로써, 그것에 대한 문제점과 해결해야 할 과제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2. 경제개발 모델의 문제제기와 그 결과) 자료출처: 에머지, 2001, 김승욱은 1971년부터 1999년까지의 경제 성장률 변화의 추이를 나타낸 그래프이다. 여기서 보면 한국은 1970년대부터 일곱 번의 불경기이고, 네 번의 경제위기를 겪었다. 여기서 1972년도는 기업위기이며, 1980년도는 박정희 대통령 사망과 5.18 사태에 대한 충격으로 발생한 것이며, 1997년도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IMF사태(즉, 외환위기)이다.1997년도에 발생한 외환위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박정희) 등이 행해지면서,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느라 들어간 외채는 정부의 지급보증에 의해 국민의 혈세로 메워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외채는 500억 달러까지 늘어났다.이 당시 박정희의 중화학 공업 육성책의 후유증으로 1984년 가을 한국은 모라토리움) 모라토리움(Moratorium): 대외채무(다른 나라에 빚을 진 것)에 대한 지불 유예(지불 시일을 늦춤)를 뜻하는 말. 상환기간이 도래했음에도 빚을 갚지 못하는 채무불이행 상태를 의미하는디폴트(Default)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디폴트가 예상될 때 먼저 모라토리움을 선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채무국(빚을 지고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나라)은 채권 금융기관들과 협상, 빚을 일부 탕감받거나 이자 조정, 만기 연장 등을 통해 향후 채무상환(빚을 갚는 것)가능성을 높이는 채무조정과정을 거치게 된다. 하지만 둘 다 지불 능력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실상 국가 부도를의미한다. 얼마전 아르헨티나가 모라토리움을 선언한 바 있다.(자료출처: http://my.dreamwiz.com/gumy55/htm/moratorium.htm)선언 직전의 상태까지 몰렸다. 당시 전두환은 이 때문에 일본을 방문 60억달러 규모의 거액의 융자를 요청할 지경이 되었으며. 만약, 융자를 실패할 경우, 한국은 이른바 중남미의 "잃어버린 10년"과 같은 똑같은 과정을 밟았을 것이다.이러한 외채의 규모는 98년도 GDP 수준의 46.8%를 차지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그대로 떠안고 있었다. 근래에 들어서 외채가 GDP 수준의 30~40%로 줄어들고 사상 처음으로 채무보다 채권이 많은 나라가 되었지만, 채권의 7~8%가 채권 불량국가인 인도네시아, 러시아 등이며, 국민총생산(GDP)에 대한 외채의 비율이 여전히 안정수준(30%)에 머물지 못하고 경계수준(30%~50%)에 머물고 있다.(한국경제신문, 1999, 11 6)이렇게 외채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지 못하면 금융위기와 같은 심각한 문제들은 다시 찾아올 것이며, 차차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고 있다을 서로 상이하게 형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1997년 촉발된 동아시아의 금융위기에서 서로 다른 대응방식과 상이한 결과를 표출하였다.한국은 금융위기의 여파로 국가가 부도직전의 상황에 처하면서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르렀으나 대만은 금융시장의 혼란을 조기에 수습하고 성장과 안정 기조를 유지해 오고 있다. 동아시아의 금융위기 앞에서 결과적으로 한국의 재벌주도 모델이 보다 취약한 구조였음이 드러났다.이렇게 대만과 한국의 경제구조와 위기 상황의 대처법을 비교하면, 재벌 주도의 성장방식은 효율성이 있을지는 모르나, 위기 관리 대처에 둔감한 멸종되었던 공룡에 비유를 할 수가 있을 것이다.(3). 정경유착경제개발 계획이 수립되고 실행되던 그 당시 기업은 수출만 한다고 하면 정부가 돈과 함께 온갖 특혜를 주었기 때문에 기업들은 정부가 끌어주는 수레에 타기만 하면 되었다. 정부가 휘어잡고 있던 은행은 특정기업에 낮은 이자로 장기대부해 주었다. 차관을 5~6%의 현금으로 들여온 기업은 자금을 생산에 투자하지 않고 은행에 넣어 25%가 넘는 이자를 챙기거나 사채를 놓아 이자수익을 노렸다. 여기서 얻어진 이익 가운데 일부는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가 더 많은 혜택을 받으려 하였다. 따라서 기업이 사느냐 죽느냐는 좋은 상품 생산에 있는 게 아니라 자본을 공급해주고 경제정책을 결정하는 정권과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어 정경유착이 구조적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가). 독점 자본의 형성박정권은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해 가는 과정에서 자본의 생산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사적 독점의 축적을 지원한다.우선, 국가의 수중에 있는 거액의 자금을 재정투융자라는 형태로 독점자본에게 유리하게 재분배하였는데, 이는 국가가 막대한 재정자금을 전략적 산업부분 및 사외간접 자본부분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국내자본의 가치정식을 지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또 금융과 금융산업을 적극 규제하였는데, 특히 중앙은행의 자율성과 금융여건을 제한하고 시중은행을 장악했으며 금리규제와 규 문제가 새롭게 떠오르게 되었다.두 번째 문제는 과도한 해외수출 주도의 경제성장 정책으로 한국 경제가 해외시장의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해외의 소비 예측이 어렵게 되는 문제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투자의 규모를 늘리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과잉 투자에 대한 우려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5). 민중 수탈체제이 시기 독점자본의 민중수탈은 바로 저임금, 저곡가정책(低穀價定策) 이라고 할 수 있다. 독점의 강화는 무엇보다도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의 강화를 의미한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실질임금상승률이다. 60-70년 노동생산성이 연평균 12.9% 의 비율로 증가하는데 반해 실질임금은 고작 4.2% 상승에 불과하다. 그리고 각종 세제지원의 정책을 통해 기업의 새 부담을 경감시킴으로써, 이 부분을 독점 자본에 집중적으로 이용하여 자급계급내의 불균등 발전을 초래하였으며 조세 체계가 간접세 중심의 극단적인 대중과세(大衆課稅)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이와 같은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농촌에서의 광범한 잠재적 과잉인구의 적체, 국가에 의한 강력한 노동통제의 뒷받침, 국가에 의해 지속적으로 추진된 저곡가정책 등 때문이다.나. 잘못된 경제개발의 결과(1). 경제력 집중일본의 경제 성장은 거대 기업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박정희 정권도 일본의 경제 성장을 모델로 한 것으로 재벌을 집중 지원해 경제성장을 이룬다는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표3에서 볼 수 있듯이, 재벌의 집중 지원 정책으로 일반 중소기업은 빈사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중소기업은 대기업에게 계열사 형태로 흡수가 되어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수직적 주종관계가 되어버렸다. 중소기업이라는 게 산업의 풀뿌리로 상품 개발과 기술력 향상을 통해 경쟁력의 저변이 되는 것인데,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재벌기업의 하청기업으로 전락해 산업발전에 엄청난 불균형이 생겼다. 각종 인·허가 특혜를 받은 대기업이 조금씩 대주는 걸로 연명하다보니 자생적 기술이나 상품을 가지고 국가경쟁력을 키울 수종속성이다. 이 대외 종속성은 경제개발 모델을 설정한 박정희 정부의 가장 큰 실책점 중 하나이며, 대외 종속성 문제는 지금도 풀어가야 할 심각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 대외 종속성이 나타나게 한 첫 번째 원인은 수출 주도 성장 방식에서 오는 오류가 있다.전후 자본의 세계경제는 미국의 막강한 생산력을 중심으로 한 체제였으나 유럽의 경제력이 복구되면서 미국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낮아졌고, 무모한 대외 팽창정책으로 해마다 적자가 누적된 미국으로서는 자국의 군사적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해 미국의 핵우산 아래 경제성장을 이룬 일본을 하위 동맹자로 삼고 한·미·일 세 나라를 묶는 지역통합 전략을 나타낸다. 그리고 한국전쟁 특수와 50년대 후반 호경기에 힘입어 크게 성장한 일본은 과잉 축적된 자본을 한국으로 돌릴 필요성이 대두되었다.이러한 국제여건 속에서 군부 쿠데타로 들어선 박정희 정권은 정권의 정당성과 물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경제성장을 제1의 목표로 삼았고, 부족한 자금사정을 대외 지향적인 개발 방식으로 대체·보완하였고 특히, 65년 한·일 경제협정을 시발로 하여 미·일 자본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내자에 의존한 수출지향 공업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수출지향 공업화는 국내 산업 육성에 대한 투자를 상대적으로 감소시켜 오늘날 지나친 대외 의존적 경제구조를 낳게 한 원인이 되었다.수출 주도 성장 방식에서 드러나는 종속성의 또 한가지는 조립수출산업 위주로 산업이 발전된 데 있다. 외국에서 부품과 기계를 사들여 조립해 만든 상품이 주종을 이루다보니 수출로 해외에서 돈을 벌어와 봐야 부품 값 갚고 기계 값이나 기술료를 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 진짜 이익인 부가가치는 뺏기고 조금씩 던져주는 먹이나 얻어먹고 사는 가마우지 경제를 만든 것이다. 자생적 경쟁력의 기반이 처음부터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대외 종속성의 또 한가지의 원인은 과도한 외자의 투입이었다. 외자의 과다투입으로 발전시킨 한국 경제는 외자 투입에 따라 경제발전의 속도가 좌우될 수밖에 없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