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의 빈번한 사신왕래와 문사들의 접촉에 의해 ‘文必秦漢 詩必盛唐’의 기치를 내걸었던 명대의 격조설이 조선 문인들의 문학인식을 크게 동요시켰던 것이다. ... 명대의 격조설은 주창자에 따라, 또는 시일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모를 하였지만 대체로 작품의 형식적 측면을 중시하면서 詩格과 聲調의 문학성이 盛唐에 근접할 것을 요구한 이론이었다.
盛唐詩人有在興趣, 羚羊卦角, 無迹可求.)」 ... (學漢魏晋與盛唐詩者, 臨濟下也.), 한위진과 성당을 사표로 삼는다.(漢魏晋盛唐爲師.)」 창랑은 한위진과 성당의 시를 제일의라고 하여 최고의 시로 평가하였다. ... 결과적으로는 그는 한(漢)·위(魏)·성당(盛唐)의 시를 추종했다.
성당(盛唐: 현종~숙종 50년간) ? 중당(中唐: 代宗 ~ 文宗 70년간) ? 만당(晩唐: 문종~ 唐末 80년간)의 4기로 나누고 있다. ... 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시대·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오탁의 현실에 젖어
성당(盛唐)의 시가를 배울 것을 제창하면서 ‘文必秦漢, 詩必盛唐(문필진한, 시필성당)’이라 주장하면서 의고주의적인 시문학 운동을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5? ... 문장은 진한(秦漢)을 표준삼는다고 하나 진한 사람들이 언제 글자마다 육경(六經)을 본받았으며, 시는 성당(盛唐)을 표준삼는다고 하나 당나라 사람들이 언제 글자마다 한위(漢魏) 것을
성당(盛唐) 에 이르러 비로소 실제적 체험에 기초한 즉시적 서정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그의 즉시적 서정은 곧 이른바 시적 감흥 혹은 영감으로서의 ‘흥회(興會)’이다. ... 또 보다 형편없는 작품은 남의 자구(字句)를 떼다붙여 작품을 만든 것으로 수수께끼이지 시가 아니다......성당(盛唐) 이후에 이르러 비로소 경물에 직면하여 정(情)을 표현하는 작품이
그는 明代 前後七子의 복고주의적 주장에서 盛唐의 詩格을 본받아야 한다는 견해를 수용하여 王世貞의 문학론의 평가를 통하여 ‘以神爲主’의 문학론을 정립하였다. ... 그래서 시인의 意와 興을 감하는 용사와 습용의 노출을 배척하고 意와 興을 자연스럽게 표출해내는 盛唐詩를 시의 전범으로 삼고 學唐詩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2) ‘신래(神來)’와 ‘신행
'왕양노락(王楊盧駱)'이라 불렸던 그는 종래의 완미(婉媚)한 육조시(六朝詩)의 껍질을 벗어나 참신하고 건전한 정감을 읊어 성당시(盛唐詩)의 선구자가 되었다. ... 당시(唐詩)는 인류 문화 예술의 보배이며 중화민족의 자랑거리로 응당 부끄러움이 없는 문학일 것이다. ⑶ 당시(唐詩)의 구분 당시의 분기에 관해서 일반적으로 초당(初唐)·성당(盛唐)·
또한 삼봉과 동문으로 관직에 오랫동안 함께 있었던 권근은 “삼봉이 지은 국가의 중요한 辭命의 글은 典雅하고 古律은 魏普과 盛唐에 따르고자 했으며 異趣는 雅頌에서 나와 질박하면서도 논리적이며 ... 詩文錄 심고 其於學也 講明則同圃隱 著述則同陶隱 微言之析 古調之一時巨擘 皆縮手柚間而不敢爭 子觀此錄果然”, 이색, 鄭宗之詩文錄, 三峰集 券 14 ) “王國辭命之文 典雅得體 古律之作 襲魏普盛唐
당시는 일반적으로 초당(初唐)·성당(盛唐)·중당(中唐)·만당(晩唐)의 4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초당(初唐: 약 7세기) - 대표적 시인으로는 사걸(四傑)로 불린 왕발, 양형, ... 외형의 미를 다루는 남조시풍의 계승성격이 강하고, 시의 운율을 다듬어 근체시의 시형을 완성시켜, 다음 대의 성운(盛運)에 앞장 선 공적이 크다. ② 성당(盛唐: 약 8세기 전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