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개화사상은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계승하고 중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유신의 영향을 받아 1853~60년대 오경석, 박규수, 유대치 등에 의해 형성되었다. ... 오경석은 베이징에서 중국의 애국청년들과 교제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귀국하면서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소개한 서적, , 등을 가지고와 지인인 유대치와 후배인 김옥균,
유대치는 봉건정부의 혹독한 탄압과 감시로 하여 깊이 간수하여 두었던 근대자본주의 문물제도를 내용으로 하는 서적의 전부를 김옥균에게 제공하였다. ... 이럼으로써 김옥균과 유대치와의 상봉은 단순한 정치적 선각자들의 개인적 접촉의 범위를 벗어나 근대 개화운동의 발단으로서의 의의를 가지게 되엇다. ... 김옥균, 유대치 등이 주장한 개화사상을 우리나라 사회 경제 발전과정에서 새로 자라나는 자본주의적 요소의 반영이었으며 사상적으로 부르조아 정치사사의 최초의 조류로 되었다.
물론 여기에깊숙이 관여하였던 유대치를 비롯하여 박제경, 변수, 유혁로, 양홍재, 백춘배 등 중인출신들도 정변의 계획단계에서부터 참여하여 정변을 주도해 나간 개화당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 그러나 박규수·유대치·오경석 등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며, 특히 81년(고종 18)에 일본을 시찰하고, 다음해 다시 수신사 박영효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을 다녀온 후에는
박규수는 사랑방을 중심으로 오경양, 유대치 등과 교류하면서 세계견문을 넓히고 나름대로는 조국이 근대화(近代化)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층 굳게 다졌다. ... 이는 곧 초기개화파(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에 의해 정립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斥洋斥倭)를 고집하는 보수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전통사회와 정치체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 이는 한국에서 초기 개화파가 형성된 시기는 1860년대이고 중추적 인물로는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 세 사람을 들고 있는데 이들은 본시 실학자였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