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중국과 삼시협정이 체결되어 독립운동가들이 다수 체포되는 등 수난이 계속되었다. 4 대표적 항일독립운동가 (1) 대종교 민족주의자 -나철나철은 대한제국기에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여 ... 재만 일본 영사관 8 (2) 마적과 일본육군의 간도출병 9 (3) 친일기관조직 9 (4) 중국동북저권과의 교섭 -삼시협정 10 4 대표적 항일독립운동가 (1) 대종교 민족주의자 -나철 ... 또한 청산리 전투를 주도했던 북로군정서 북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신민부, 한국독립당 등도 이들 신자에 의하여 조직된 단체들이었다. 1나철의 민족운동 역사적 성격 · 민족종교인
이름 또한 인영에서 철로 바꾸어 이 때 부터 나철로 불리기 시작했다. ... 이에 나철은 1910년 4월 7일 대종교로 교명을 바꿔 단군이라는 두 글자를 내세우지 않음으로서 교단을 지키고자 했다. ... 고려 원종 때 몽고의 침입으로 그 맥이 끊긴 것을 백봉이 백두산에서 도인 33인과 함께 다시 일으키고, 나철이 이를 전수받아 700년만에 다시 빛냈다는 것이다.
출옥 후 나철은 단군교를 창시하게 된다. 나철과 단군교는 일제 당국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단군교의 이름을 대종교로 바꾸었다. ... 나철은 29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와 승문원권지부정자를 역임하였다. ... 실질적인 단군교의 시작은 1909년 나철에 의해 “단군교”라는 종교로 출발하였지만 그 시기가 바로 일제가 한국을 강점할 때였으므로, 종교로서보다는 항일독립운동에 더 많은 공헌을 했다고
(1813~1916)이며, 나철은 단군이 나라를 세운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開天節)로 공포해 기념일로 삼았다. ... 대종교는 교단의 존속과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1914년 만주로 그 근거지를 옮겼으며, 나철은 1916년 8월 15일 단군의 유적이 있는 구월산으로 들어가 일제의 탄압에 대한 항의 ... 신민회 히원 가운데 일부는 독립이 실력 양성의 전제 조건임을 깨닫고, 실력양성론을 비판하며 독립전쟁론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현실로 나서 태어난 나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