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analyze daily meal of royal meal, studied Soora Sang were on record Wonheng Ulmyo Jungri Euigwae(1795). Historic book 'Jungri Euigwae' described t..
그 중 유일하게 궁중 일상식을 알 수 있는 문헌으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가 남아 있다. ... 효자로 소문난 정조가 1795년(정조 19년) 음력 2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준비한 다과상의 식단은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 정리의궤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왕이 현륭원(顯隆園:莊祖陵)에 행차한 뒤 정리의궤청(廳)을 설치하여 편찬 간행하도록 하였다.
정조의 을묘년 원행을 기념하여 김홍도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화원들과 병풍 여덟 폭을 공동 제작하였다. ? ... 김홍도는 이 해 윤이월 28일에 있었던 행차를『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 로 편찬하기 위한 도설 삽화의 제작을 맡았다. ? ... 여름 비 오는 날에는 부채 그림 를 그려 이용눌(李用訥) 에게 주었고, 12월에는 여섯 폭 병풍을 제작하였다. 2.
정조의 을묘년 원행을 기념하여 김홍도를 중심 으로 하여 여러 화원들과 원행을묘의궤도(園幸乙 卯儀軌圖) 병풍 여덟 폭을 공동 제작하였다. - 8월에 『을묘년화첩(乙卯年畵帖)』을 그렸다 ... 노년 무렵 빛과 그늘 1795년/51세 - 김홍도는 이 해 윤이월 28일에 있었던 행차를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로 편찬하기 위한 도설 삽화의 제작을 맡았다. - 이후 ... . - 여름 비 오는 날에는 부채 그림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를 그려 이용눌(李用訥)에게 주었고, 12월에는 서원아집도 여섯 폭 병풍을 제작하였다. 1.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라는 커다란 벽화를 그린 것, 또 국왕의 친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위한 절 용주사(龍珠寺)의 대웅보전(大雄寶殿) 불화를 제작한 것, 또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 또 이 해 여름에 부채그림 를 그리게 되는데 작품에 보이는 강세황의 화제가 그 전해 7월에 씌어진 것을 보면 어떤 사정이 있어 이때서야 비로소 그린 것으로 ... 이 때 궁중의 대화역에 차출되어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의 도설 삽화를 맡아 삽화와 8곡의 병풍을 완성하게 되는데 화성에서 출발하여 시흥 행궁 앞에 도착하는 장대한 어가
경의왕후의 환갑잔치 내용을 치밀하게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 園幸乙卯整理儀軌 》에 김홍도의 책임아래 최득현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허식 등의 자비대령화원( 差備待令畵員 )들이 제작한 ... 정조대왕화성행행반차도( 正祖大王華城幸行班次圖 ) 또는 화성행차도( 華城行次圖 )라고도 한다. ... 정조대왕 화성반차도 조선 22대 왕 정조가 어머니 경의왕후( 敬懿王后 : 혜경궁 홍씨 )의 환갑을 기념하여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가 묻힌 화성 현륭원( 顯隆園 )으로 행차하는
정조 19년(1795) 1월 수권이 을묘원행(乙卯園幸)을 앞둔 가운데, 정조의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소론 출신이 ‘귀근(貴近)’ 정동준(鄭東浚))의 비행이 노출되어 단죄되는 사건이 ... 이 시기에 정동준은 ‘귀근(貴近)’ 출신의 ‘권행(權幸)’) 으로서 정조의 의중에 따라 장용영 강화와 화성 성역 추진에 대한 비판 여론을 잠재우는 등 막후에서 막강한 역할을 담당했다 ... 가마는 본래 왕이 타던 것으로, 일반인들은 혼례나 장례에서만 사용하였으나 불교가 대중화되면서 재의식에 쓰이게 되었다. 24)《홍재전서》 군57, 잡저(雜著) 천원사실(遷園事實) 25
이 책은 화성을 건설하고 나서 만든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와 정조의 화성행차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그리고 그 밖의 많은 문헌을 토대로 지어졌다. ... 이는 잔치의 내용을 낱낱이 기록한‘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와, 행궁의 모습을 생생히 담은‘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 구성은『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1795년)』의 기록을 근거로 악·가·무(樂·歌·舞)일체의 예연으로 꾸몄고, 국립국악원 정악단, 무용단, 국립국악고등학교 학생까지 150명의
기록한 儀軌(구체적으로 園幸乙卯整理儀軌와 華城城域儀軌 중심)에 나타난 정조자신의 여러 가지 모습과 그 당시의 전반적인 모습에 대해서 正祖의 華城행차 그 8일을 主로 삼아 말해보고자 ... 이후에는 정조가 華城이라는 지금으로 말하면 신도시를 건설하고 그 곳에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이전하고는 어머니 惠慶宮과 돌아가신 아버님의 회갑에 즈음해 그 곳으로 園幸을 하는 것을 ... 정조의 華城행차에서는 思悼世子의 묘인 顯隆園에 전배하는 것이 일단은 그 第一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어머님의 회갑연도 굳이 華城에 가서까지 장대하게 벌일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맡았던 일을 그대로 시켜서 시종 혜택을 입게 하1795년(정조 19년) 윤(閏) 2월 현륭원에 행차하고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수원에 머무르면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베풀었다(乙卯園幸 ... 수원은 옛적에는 한반도의 중심부를 차지하려는 삼국간(三國間)의 치열한 쟁패로 일진일퇴를 거듭한 역사의 현장이었으며, 뒷날에는 정조대왕(正祖大王)의 효심이 깃든 효원(孝園)의 고장이다 ... 일찍이 정조(正祖)는 1789년 10월 비운의 생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역을 최길지(最吉地)의 명당으로 지목된 수원부 용복면(龍伏面) 화산(花山)의 현륭원(顯隆園) 이장을 계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