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김시흥
- 최초 등록일
- 2008.11.04
- 최종 저작일
- 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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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김녕김씨의 관조(貫祖) 김시흥(金時興)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네째 아들인 은열(殷說)(大安君)의 칠세손(七世孫)이며, 동정공(同正公) 봉기(鳳麒)의 아들로 시호(諡號)는 문열(文烈)이시며, 경순왕(敬順王)의 팔세손(八世孫)이요, 시조(始祖) 대보공(大輔公)의 三十五世孫이시다. 수성군(隨城君) 휘 품언(諱 稟言)의 현손(玄孫)이요. 중서령 문정공 휘 순보(中書令 文正公 諱 順輔)의 증손(曾孫)이시다.
공(公)은 고려 인종 원년(高麗 仁宗 元年(1123)) 때 한림원(翰林院)에 오르신 뒤 병부시랑동북면병마사(兵部侍郞 東北面 兵馬使)를 역임하시면서 많은 치적(治績)을 남기셨고, 인종십삼년(仁宗十三年(1123)) 묘청조광(妙淸 趙匡)등이 서경(西京)에서 난(亂)을 일으킬 때 공(公)은 왕명(王命)을 받들어, 김부식(金富軾)과 함께 묘청(妙淸)의 난(亂)을 평정(平定)하신 공(功)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시어 정당문학(政堂文學)광록대부 평장사(光祿大夫 平章事)에 오르셨으며, 금주군(金州君)을 훈봉(勳封)하시었다. 그 후 삼년간이나 계속해 오던 국란(國亂)을 평정하시니, 왕은 공(公)을 높이 칭찬하시며, 식읍천호(食邑千戶)를 下賜하시고 상락군(上洛君:尙州)으로 이봉(移封)되시었으니, 이 어른이 우리의 봉관조(封貫祖)이시다. 배는 부부인 개성왕(配府夫人 開城王)氏이며, 묘는 개성 송악산(墓開城松嶽山)에 있다고 하나 실전(失傳)되었다.
관조(貫祖)께서 봉군(封君) 받으신 금주(金州)는, 성종 십사년(成宗 十四年:995)에서 원종 십일년(元宗 十一年:1270) 사이에만 써 왔고, 그 후 다시 김녕(金寧) 또는 분성(盆城)으로 고쳤다가 충선왕 이년(忠宣王 二年:1310) 부터는 김해(金海)로만 써왔기 때문에 우리의 본관(本貫)을 김해(金海) 혹은 분성(盆城)으로 써 왔던 것이다.
한편 시조(始祖)가 전연 다른 가락국 수로왕 후예(駕洛國 首露王 後裔)들도 같은 김해(金海)로 본관을 써왔기 때문에 선김(先金)이라 일렀고, 김녕군(金寧君)의 후손인 우리 종문(宗門)은 후김(後金)이라 불러 구분하여 왔던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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