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와 북방민족
- 최초 등록일
- 2008.10.25
- 최종 저작일
- 2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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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흉노,저,강,선비,갈 족등 고대 유목민족과 요,금,원,청의 정복왕조를 정리한 글입니다.
목차
Ⅰ. 문화변용론(文化變容論)과 정복왕조론(征服王朝論)
Ⅱ. 침투왕조(浸透王朝)와 정복왕조(征服王朝)
1. 침투왕조
2. 정복왕조
Ⅲ. 제국질서를 완성한 청(淸)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침투왕조
고대로부터 한족과 큰 대립관계를 이루며 때로는 중국국가를 크게 위협하였던 흉노족은 한무제의 대대적인 정벌사업으로 인하여 그 위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하지만 후한 말기와 삼국시대를 거치며 전염병과 전쟁 등으로 인하여 중국 국가는 인적 자원이 점차 부족하게 되어 북방민족을 중원지방으로 이주시키기 시작하였으며 진무제(晉武帝) 사후 일어난 8왕의 난을 통해 흉노족뿐만 아니라 북방민족의 군대가 중국 내륙으로 진출하게 된다. 그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흉노족의 유연은 평양에서 황제를 칭하며 흉노족의 국가인 최초의 침투왕조 한(漢)을 건국하게 되는데 이는 오호십륙국(五胡十六國)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 후 중원지방에서는 흉노족뿐만 아니라 강족, 저족, 갈족, 선비족 등 북방민족들의 국가들이 세워지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북방민족과 한족의 중국 중원에서의 융합을 보통 호한체제(胡漢體制)라고 한다.
한족의 국가가 아닌 북방민족의 국가가 중원에서 건국되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완전한 국가는 아니었다. 조위(曺魏)에 의해 멸망한 촉한(蜀漢)을 계승한다고 하여 국호를 한(漢)이라고 정하였던 흉노족 추장이었던 유연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여전히 한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유연의 후계자였던 유총은 화이관념에 대비하기 위하여 호한분치정책을 실행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이 후 등장한 갈족의 국가 후조(後趙) 또한 북방민족과 한족의 결합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과제들만 남겨놓고 멸망하게 된다.
이것으로 보아 호한분치정책은 북방민족적 세계와 한족적 세계가 양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북방민족 종족간의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는 북방민족들에게도 북방민족 정권에 대한 거부감을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한과 진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목소리도 점점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종족간의 갈등을 완화시키고 융합하려 했던 인물이 전진(前秦)의 부견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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