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현대 미술의 이해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과 마네의 풀밭 위의 결혼
작가 소개, 시대 배경 속에서 나타난 작가의 생각, 여성의 역할과 사회적 의미, 여성의 시선에 관한 주관적 견해
목차
1.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7.9]2. 에두아르 마네[1832.1.23~1883.4.30]
3. 작품 속의 작가의 생각이 시대적 배경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비교하여 생각해보기.
(1) 아르놀피니의 결혼
(2) 풀밭 위의 점심
2. 두 작품에 드러나고 있는 여성의 역할과 사회적 의미에 관하여 알아보기.
3. 여성의 시선에 관하여 각자의 느낌을 주관적 견해로 기술해보기.
본문내용
3. 작품 속의 작가의 생각이 시대적 배경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비교하여 생각해보기.(1) 아르놀피니의 결혼
이 그림에는 중세 정략결혼에 관한 작가의 생각이 담겨있다. 그림의 모델인 신랑 지오반니 아르놀피니는 이탈리아 무역상으로 많은 돈을 번 사람이었다. 그는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고 판단력도 우수해 정부 재무담당이라는 요직을 차지하는 등 이름을 날리던 인물이었다. 부끄러운듯 살포시 고개를 숙인 신부는 조반나 체나미라는 이탈리아 유명 은행가의 손녀이다. 당시 플랑드르에서는 교회가 아닌 가정집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는 하나 당대의 최상위층이라고 할 수있는 인물들이 이렇게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는지에 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바로 이 결혼이 가문끼리 하는 일종의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이다. 그림 속의 신랑은 60대의 남자이고 자신의 권세를 이용해 젊은 유부녀를 겁탈한 뒤 결혼식을 올려서 정식 정부로 삼았다고 한다. 그 결혼식에 얀 반 아이크가 증인으로 초대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르놀피니의 의뢰에 의해 `결혼 증명서`와 같은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 그려진 것이다. 얀 반 아이크는 정략결혼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여러 가지 도상을 그림속에 배치함으로써 숨겨 놓았다. 그림의 한 가운데를 보면 벽에 거울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남자와 여자 사이로 보이는 거울의 틀에는 10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는 모두 그리스도의 수난을 표현한 것으로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죽음의 길을 걸을 때 머물렀던 장소이다. 거울 속에는 방 반대의 정경을 환히 비추고 있고 거기엔 아르놀피니 부부 외에 또 다른 두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거울 위를 보면 글씨가 쓰여 있는데, 거기에는 라틴어로 "Johannes de eyck fuit hic-얀 반 에이크가 이 자리에 있었노라,1434"라고 적혀있다. 즉, 이 결혼을 얀 반 에이크가 증명한다는 것이다. 거울 옆에는 묵주가 걸려있다. 묵주가 반짝거리는 것으로 보아 재질은 크리스털이다. 크리스털은 순수와 순결을 상징하며 당시 부자 신랑이 신부에게 선물하곤 했다. 천장에는 놋쇠로 만든 샹들리에에 촛대가 있다. 켜 놓은 촛불 하나는 결혼을 뜻한다. 촛불 하나는 최초의 빛을 상징한다. 천지창조 첫날의 창조가 빛의 창조이다. 이 빛의 창조를 시작으로 천지만물의 운행이 시작되었으므로 신성한 섭리의 시작인 결혼과 상통한다. 촛불 하나가 결혼을 뜻한다면 이제 막 꺼진 초 하나는 결혼식이 방금 끝났음을 의미한다. 오른쪽 침대 뒷벽에 놓은 의자 등받이의 목조장식은 두손을 모은 성녀 마르가리타의 상인데, 이는 자식을 고대하는 여성의 수호성자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취한 포즈는 남편이 한손으로 아내의 손을 쥐고 다른 한 손을 들어 서약을 하고 있는 결혼 의식이다. 이 서약 후 남편의 오른손은 아내의 오른손에 겹쳐지고 두 사람은 영원히 맺어지게 된다. 아내의 왼손에는 이미 두 사람이 맺어졌음을 증명하는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어서 이 장면의 의미를 한층 분명하게 말해준다. 남자가 입은 옷은 신교도인 위그노파의 옷으로, 이 남자는 신교도이거나 배경이 되는 곳이 신교도 도시일 것이며 모피가 붙어있는 것으로 봐서 꽤 잘 사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여자가 쓴 너울은 린넨으로 만든 베일로, 성전에서 예배를 볼 때 머리에 쓰는 의식용 너울이다. 신부의 배가 볼록한 것으로 보아 임신을 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들 부부의 기록을 보면 자식이 없던 것으로 나타나 임신한 것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당시에는 복부 부분을 볼록하게 하는 패션이 유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