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초 명사의 서울 방문 연구 : 강왈광의 유헌기사를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08.05.29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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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본고는 광해군의 중립외교와 관련된 대내외적 배경 및 재조명을 위한 논문제작에 활용하기 위하여 제작한 자료이다.
논문의 전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비판적 읽기를 통하여 필자의 논지를 파악하고 본인이 지적한 부분 또한 색다르게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독자에게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현재의 시각에서 뚜렷하게 연구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목차
Ⅰ. 서론
Ⅱ. 17세기 초 명사의 징색의 폐단
Ⅲ. 강왈광의 ‘청렴’과 그 의미
Ⅳ. 맺음말
본문내용
Ⅲ. 강왈광의 ‘청렴’과 그 의미
1. 강왈광의 생애와 「유헌기사」
2. 강왈광의 조선에서의 활동과 ‘청렴’
1) 조선에 온 목적 : 명의 황태자 탄생 사실을 전달하기 위함
2) 조선의 접대에 대한 인식의 전환 : 조선 주최의 성대한 연회와 뇌물 거절
▶ 명사접대에 대한 부담은 이미 조선에게 있어서 관례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강왈광은 청렴하나로 생을 살아온 지라 조선인들에게는 그것이 새롭게 느껴졌을 것이다. 중화사상 안에서 이루어진 사대관계를 유지해오던 명과 조선의 상황에서, 강왈광은 그저 예전의 명사들이 행했던 대로 조선을 대했을 뿐이다. 곧, 강왈광의 ‘청렴’이라는 것은 명사들의 폐단이 극심하였다는 사실에 의해 부각된 것이며,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게 한다.
3) 인조와 만남
(1) 인조의 예물을 거절, 예와 법도에 대해 엄격한 태도
(2) 요동민 문제로 인한 인조의 발언을 적당히 넘김.
▶ 필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저 있는 사실만 열거하기에는 논문을 대하는 소임이 부족하다고 본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은 국왕으로서의 당연한 도리일 터, 강왈광은 자신 또한 명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누구의 편을 들어주기란 참으로 난해한 문제였을 것이다. 따라서 적당히 넘어갔다고 한 것은,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인조가 명나라 사신에게 고개를 조아린 태도가 못마땅했다든지, 아니면 본인이 앞서 말한 대로 난감한 상황을 탈출하기 위한 태도였든지, 여러모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3. 강왈광의 ‘청렴’의 의미
1) 청렴의 목적
(1) 명의 국가적 위기에 대한 방안을 조선방문으로써 모색
(2) 명의 권위를 강조하고 국가적 이익을 추구
참고 자료
한명기. 「17세기 초 명사의 서울 방문 연구 : 강왈광의 『유헌기사』를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제 8호.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1997. pp.3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