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회의 좌우 합작 운동
- 최초 등록일
- 2008.03.30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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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간회와 좌·우 합작 운동에 대해서 적음.
신간회 결성당시 상황과 신간회의 결성, 활동, 해소, 근우회에 대해 적고
신간회의 의의와 한계를 살펴봄
목차
주제 : 신간회와 좌우 합작 운동
서론 : 신간회 결성당시 상황
본론 :
1. 신간회의 결성
2. 신간회의 활동
3. 신간회의 해소
4. 근우회
결론 : 신간회의 의의와 한계
참고문헌
본문내용
서론
3·1운동 이후 민중의 정치적 자각과 진출이 급속히 높아지면서 민족운동이 국내외에 걸쳐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만주에서는 무장독립투쟁이, 중국관내에서는 상해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외교활동이, 국내에서는 노동·농민·청년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대해 일제는 `문화정치`라는 기만적인 개량 정책을 써서 민족독립운동 역량의 분열과 약화를 모색했다. 특히 일제는 당시 광범위하게 전개되던 실력양성운동을 일제 지배 하에서 자치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 자치운동으로 전환시키려 했다. 그로 인해 민족주의 세력 중 일부가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완전 독립, 절대 독립의 길을 포기하고 일본 제국 내에서의 자치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이른바 ‘자치론’을 주장한 것이다. 1925년 1월에 발표된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은 자치운동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게다가 사회주의 운동이 크게 고조되면서 민족주의 운동 세력과 사회주의 운동 세력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심해졌다.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일제를 타도하고 민족의 해방을 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분산된 운동단체를 통합하여 독립 운동의 역량을 높이고, 아울러 좌우로 분열된 민족운동 전선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한 운동이 국내외에서 일어났다.
이런 사회적 배경 속에서 조선일보 계열의 이상재(李商在)·안재홍(安在鴻), 천도교 구파(舊派)의 권동진(權東鎭) 등은 `비타협적 민족전선의 수립`을 제창하면서 자치운동에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한편, 3·1운동 이후 급속히 성장한 사회주의자들과의 협력을 모색했다. 사회주의자들도 초기의 계급 중심적 사고를 극복하고 1924년경부터는 `타협적` 민족운동과 `혁명적` 민족운동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26년 들어 비타협민족운동과의 협력이 조직적으로 모색되기 시작했다. 비록 실행단계에 이르지 못했지만 제2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 강달영(姜達永)과 권동진·안재홍·김준연(金俊淵) 등이 비밀리에 접촉하여 자치운동세력의 움직임에 대응한 국민당 형태의 민족통일전선 조직을 결성하고자 한 것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참고 자료
◇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7(현대) (솔)
◇ 한국 근 · 현대사 (금성출판사)
◇ 네이버 지식 in
◇ 네이버 블로그
◇ 다음 백과사전
◇ 네이버 백과사전
◇ 朴容玉 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