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학사> 명사
- 최초 등록일
- 2007.06.12
- 최종 저작일
-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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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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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명사』 편찬
Ⅱ『명사』 편찬의 세 시기
Ⅲ.청대 사람들이 편찬한 명대 편년사 및 기타 명대와 관련이 있는 사서
본문내용
『명사』는 순치 때부터 건륭 때까지 95년 동안 세 차례 편찬을 거쳐 완성된 정사로, 정사 가운데 제일 오랜 시간이 소유되고 편찬 규모가 가장 컸다. 제 1차는 입관 직후인 순치 2년(1645)에 내삼원대학사 풍전(馮銓), 홍승주(洪承疇) 등에게 명하여『명사』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는 청이 지식인들을 회유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러나 성과가 없었다. 두 번째는 강희 18년(1679)에 대학사 서원문(徐元文)·장옥서(張玉書) 등을 청재로 삼아 『명사』로 칙찬(勅贊) 하도록 하였다. 이때 50명이 박학홍사과로 들어왔으며 기대 하였던 황종희는 들어오지 않고 그의 제자 만사동이 들어와 포의로 참여 하였다.
그리하여 강희 53년에 왕홍서(王鴻緖)가 「열전」202권을 황제에게 올리고, 옹정 원년(1723)에 다시 「본기」와 「표」,「지」 108권을 상주하여 45년만에 『명사』의 초고가 완성되었다.(이는 바로 왕홍서의 『명사고』로, 실제로는 만사동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잘 되었다고 판단되지 않아 다시 편찬에 들어가게 되었다.
세 번째는 옹정 2년에 장정옥(張廷玉) 등에게 재수정 하도록 하여 건륭4년(1794)에 왕홍서의 것을 바탕으로 마침내 설관수사(設館修史)로서는 가장 오랜 기간 즉 95년만에 완성하였다. 그 후 건륭 42년(1777)에 다시 영렴(英廉),정경이(程景伊),화신(和神) 등에게 명하여 원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검토하여 마지막 수정본으로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보는 『명사』이다.
이처럼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참여자들이 일부 명·청 교체기의 역사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서로 기피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청조의 비위를 건드려 화를 당하지 않을까하는 염료도 작용하였다. 강희·옹정·건륭시대에 일어난 문자옥 가운데 명사(明史)문제로 일어난 것이 있었기
참고 자료
유절 저, 산태갑 역, 「中國史學史 講義」, 신서원, 2000
신승화, 「중국사학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