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 증정부인박씨묘지명 을 읽고
- 최초 등록일
- 2007.01.14
- 최종 저작일
- 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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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문명문장선독 이라는 전공수업을 들었을때 작성했었던 자료입니다.
교수님께서 각자
목차
없음
본문내용
o o o:
조선시대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여자가 한번 시집을 가면 출가외인으로 여겨 ‘시집의 뼈를 묻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친정 식구들을 볼 기회가 없었죠. 그래서 연암도 누나를 거의 볼 수 없었을 거예요. 또 8살 이전의 기억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연암이 누나를 기억할 수 있는 모습은 누나의 시집가기전의 그 모습이 마지막이자 유일하다고 할 수 있겠죠.
그 때문에 연암은 누나가 죽고 나서 누나를 떠올렸을 때 그 기억만이 있기때문에 그때의 이야기를 묘지명에 새긴 것 같아요.
o o o:
조선시대라고 해도 연암은 양반이었어. 양반의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누이가 보고 싶을 때면 누이집에 가서 그냥 편하게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또 자형의 형편과 무능함을 잘 알고 있는 듯한 원망의 글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연암은 결혼 한 후 누이의 형편을 잘 알고 있었고 누이와 왕래하며 지냈다고 보여져. 그래서 누이를 만날 수 없었다는 너의 의견은 가정할 수 없다고 봐.
o o o:
o o의 의견 중 연암이 양반이라서 누나를 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에 나는 반론하고 싶어. 왜냐하면 조선 후기 국몰의 위기는 지나치게 현실과 동 떨어진 양반들의 명분중시, 허례허식이 그 이유 중 하나일거야. 그런 점을 미루어 봤을 때 출가외인이라는 그 당시 사회의 통상적인 이념은 양반층에서 더 철저히 이루어 졌을 것 이라는게 내 생각이야. 그러므로 연암이 양반이기 때문에 누나를 볼 수 없었다는 o o이의 의견이 맞는 것 같아.
참고 자료
伯姊 贈貞夫人朴氏墓誌銘 을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