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안중근 의사
- 최초 등록일
- 2006.01.27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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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안중근의사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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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안중근 의사는 항일 독립투사, 구한말의 독립의사이자 교육자로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이름은 응칠이었다. 16세 때 가톨릭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공부하였으며 사격솜씨도 남달랐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우리나라에 더욱 압력을 가하여, 이듬해에는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우리나라의 자치적인 외교권마저 빼앗자 울분을 느낀 안중근은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일본군과 싸웠다. 그 후 1907년에는 남포에 삼포학교와 돈의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러냈다. 그러던 중 한일신협약에 의해 우리나라 군대가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1908년 의병부대의 참모장이 되어 일본국과 싸웠으며, 이듬해 뜻을 함께 하는 11명의 동지들과 죽음으로써 구국 투쟁을 벌일 것을 다짐하였다. 그 해 10월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일제 침략의 우두머리인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쏘아죽이고 체포되었다. 여러 차례 재판을 받았지만 모진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의연한 자세를 지키다가 이듬해 3월 뤼순감옥에서 사형 당했다. 저서로는 옥중에서 쓴 “동양편화론”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주어졌다.
안중근은 조선 왕조 말엽인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읍 광석동에서 태어났다. 안중근은 고려 말의 이름난 유학자 안유의 후손으로, 할아버지 안인수는 진해 현감을 지냈으며 집안이 넉넉해서 해주에서 알아주는 큰 부자였다. 아버지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남달리 뛰어났던 사람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안태훈은 조씨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이 바로 안중근 의사이다. 안중근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슴과 배에 검은 점 일곱 개가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아 태어났다 하여 자를 응칠이라 했다. 안중근이 7세 때, 아버지 안태훈이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에 관련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쫓기는 몸이 되었다. 다행히 고향으로 몸을 피한 안태훈은 벼슬에 대한 꿈을 버리고 가족을 모두 이끌고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했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경치가 아름다운 청계동에서 안중근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안중근은 일찍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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