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근대사] 갑오개혁과 명치유신을 통해 본 한국과 일본의 근대화
- 최초 등록일
- 2005.01.27
- 최종 저작일
- 2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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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2. 명치유신과 갑오개혁의 성격과 의의
3. 명치유신과 갑오개혁의 주동세력
4. 명치유신과 갑오개혁의 개혁내용
5. 명치유신과 갑오개혁의 대외관계
6. 결
본문내용
명치유신기는 1854년 미일화친조약 체결에서 1877년 지조개정 실시까지 보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 19C 유럽제국과 미국이 산업혁명에 돌입하였고, 자원과 시장을 찾아 아시아를 침략하였다. 중국을 침략한 제국주의자들은 그 목표를 일본으로 돌려 여러 차례 통상외교를 벌렸다. 미국 페리제독의 통상압력에 굴복하여 에도막부는 1856년에 미일수호 통상조약을 조인하였다. 이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며 사쓰마, 쵸슈번을 중심으로 존왕양이 사상이 유행했고 이를 기반으로 반막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그리고 황실도 이에 공모하였다. 이들의 배외사상은 나무부기 사건으로 외국세력과 충돌하여 시모노세끼와 가고시마 해전에서 패하고 만다. 이 해전에서 서양세력을 확실하게 인식한 그들은 개명정책으로 전환함과 동시에 외국세력에 지원을 얻게 된다. 막부는 쵸슈번과 사쓰마번의 반막운동이 심해지자 무력진압에 나서게 되지만 제2차 쵸슈정벌에 실패하게 된다. 이에 반막부 세력은 막부에 정치적 혼란을 이용, 도쿄를 점령하고 천왕중심에 왕정복고를 선언하여 본격적인 메이진유신이 실시되었다. 메이지유신의 개혁은 정치, 경제 중심으로 한 '부국강병책'과 사회전반에 걸친 '문명개화정책'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전자의 정책은 지조개정(1873), 폐번치현(1871), 징병률(1872)등이고 후자의 정책은 태양력 사용, 전신, 전화설치, 철도 가설, 1주7일제와 일요휴일제 채택, 신문 ,잡지발행 등을 들 수 있다. 개혁과정에서 이익도 있었지만 이 개혁에 소외된 계층들은 메이지정부에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사회 지도층은 내부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정한론이 대두 되었고, 곧 정한론파와 반정한론파로 나누어져 투쟁했지만 정한론파는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재야로 들어간 그들은 의회개설과 헌법재정을 촉구하게 되었고 이에 정부는 이토오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한 헌법개정을 착수하게 된다. 1888년에 천황에 이름으로 헌법을 반포하니 이것이 1946년까지 시행된 명치헌법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