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들의 설교와 성서해석(칼빈)
- 최초 등록일
- 2024.05.09
- 최종 저작일
- 2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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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칼빈의 생애 "칼빈의 신학사상-신복윤“
2. 칼빈의 성서해석 원리
3. 칼빈의 성서해석 방법
본문내용
1. 칼빈의 생애 "칼빈의 신학사상-신복윤“
칼빈은 1509년, 프랑스 북부의 노용에서 태어났다. 파리, 오를레앙, 부르제 대학에서 수학하여 에라스무스와 인문주의의 찬양자가 되었다. 그는 1532년에 인문주의 학자다운 저서를 발표했다. 그것은 로마 철학자 세네카의 <관용론>에 관한 주석이었으나, 그가 기대했던 만큼의 반응은 일으키지 못했다. 이 무렵에 칼빈이 회심했던 것 같다.
그는 곧 신학 연구에 전념하게 되었다. 1533년 그는 파리 대학의 신임 학장으로 취임한 니콜라스 콥의 온건한 프로테스탄트적 연설에 연루되었다. 칼빈은 살던 곳을 급히 떠나야 했다. 칼빈은 연구와 저술을 위해 프랑스를 떠나 바젤에 정착했다. 1535년 여름에 그는 <기독교 강요> 초판을 완성했으나, 그의 학자로서의 평화롭던 생애는 끝나게 되었다. 1536년에 그는, 어떤 지방에서 전쟁이 일어나서, 부득이 우회하여 제네바를 거쳐 스트라스부르크에 가게끔 되었다. 칼빈이 제네바를 잠시 들르게 된 이 우발적 사건이 유럽사의 극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제네바는 일부 정치적 이유로 즉시 종교개혁을 받아들였다. 칼빈은 그 곳에서 단 하룻밤만 지내기로 계획했으나, 제네바 개혁자들의 지도자인 파렐은 그를 그 곳에 머물도록 강요했다.
시의회는 1536년에서 1538년까지 제네바에서 사역하게 된 <그 프랑스인> 칼빈의 임용에 주시했다. 이 곳에서도 그는 여전히 성급했고 미숙했다. 교회 정치 문제에 대한 어떤 논쟁으로 인해서 추방당하자, 그는 연구 생활을 위해 바젤로 물러나기로 했다. 그러나 후에는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부쳐는 그가 프랑스 난민의 적은 회중을 위해 사역하도록 스트라스부르크로 오라고 강요했다. 칼빈은 부쳐가 파렐이 했던 것처럼 요나의 예를 들어 위협할 때까지 응하지 않다가, 마지 못하여 이를 수락했다. 결핍은 고사하고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보낸 몇 년 동안은 즐거운 나날이었다. 그는 부쳐와 다른 개혁자들과 접하는 것을 즐겼고, 이것에서 큰 유익을 얻었다.
그는 1539년에서 1541년에 걸쳐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캐톨릭 사이에 개최된 회담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 그는 그 기간 중에 멜랑히톤과 친교를 갖게 되었다. 그는 또한 재침례파에서 개종한 과부를 아내로 얻었다. 그런데 칼빈이 그 곳에 머무는 동안에 제네바 교회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결국, 1540년에 절망에 빠진 행정 장관들은 칼빈의 귀환을 요청하였다.
참고 자료
신복윤. 『칼빈의 신학사상』(서울:성광문화사 1993)
손석태. “칼빈의 성경해석” 칼빈관련자료집 (서울:감리교신학대학교)
T.H.L. 파아커. 『칼빈과 설교』(서울:솔로몬출판사 1993) 김남준 역.
이양호. 『칼빈 생애와 사상』 (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