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 주재 미 외교관 인질사건
- 최초 등록일
- 2020.12.25
- 최종 저작일
- 20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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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테헤란 주재 미 외교관 인질사건"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사실관계
Ⅱ. 잠정조치에 대한 양국의 주장과 ICJ의 판결
1. 미국의 주장
2. 관할권 성립여부에 대한 다툼
3. ICJ의 판결
Ⅲ. 주요쟁점과 본안판결
1. 미국의 주장
2. 미국의 주장으로부터 도출되는 주요쟁점
3. ICJ의 본안판결
Ⅳ. 평가 및 결론
1. 이란이 ICJ의 판결을 무시한 점에 대한 의견
2. 이 사건의 의미
본문내용
1979년 1월 16일 이란 국왕 팔레비는 급격히 고조된 반체제 운동에 신분의 위협을 느끼고 외국으로 탈출하였다. 반면 팔레비 축출 운동을 외국에서 지도하고 있던 이슬람교 시아파 최고지도자인 호메이니는 망명지인 파리에서 귀국하여 이란에서 종교와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979년 10월 22일 멕시코 망명중인 국왕은 질병 치료를 위해 미국에 입국이 허가되었지만 이란은 이것을 미국에 의한 망명 승낙으로 판단하여 미국을 격렬히 비난하고 전 국왕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였다. 미국은 인도상의 이유로 이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 직후 11월 4일 호메이니를 지지하는 학생집단이 수도 테헤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습격하여 점거함과 동시에 대사관에 있던 직원 등 60여 명을 억류하였다.
1979년 11월 4일 테헤란 시각 오전 10시 30분경, 대략 3000명의 참가한 시위 도중, 수백명의 시위자들이 미국 대사관을 침입했다. 이런 사건이 벌어지는 내내, 이란당국의 도움과 함께, 대사관 부지 밖에서는 집회가 열렸다. 수백 수천 명의 시위자들이 11월 22일 대사관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납치범들은 인질을 풀어줄 것을 거부했으며, 인질을 풀어주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의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들은 여차하면 인질들을 죽이겠다고 여러 차례 협박했다. 13명의 인질들이 11월 18일과 20일에 풀려난 반면에 적어도 50명의 미국인이 포로로 남아있었다. 실질적으로 대사관의 모든 외교관과 전문적인 직원들이었다. 대사관을 점령한 단체는 남아있는 인질들은 첩보활동을 한 죄가 있다고 주장했고 그들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을 시에는 인질들이 그 죄 값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란정부는 미국에서 파견한 특사를 받아드리는 것도 거부했다. 공격이 시작되었을 당시 외무부에 있던 미국 대사는 외무부에 구류당했으며, 다른 대사관의 동료들이나 이란의 고위공직자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을 거부당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