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위-북제시기 호한체제
- 최초 등록일
- 2020.08.03
- 최종 저작일
- 20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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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위-북제시기 호한체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머리말
Ⅱ.호한갈등의 소재
1.‘한화’와 ‘반한화’ 세력의 대립
2.문·무 세력의 분화
Ⅲ.양도제와 이중구조
1.선비인의 제2의 ‘향리’: 진양
2.제2의 낙양: 업도
Ⅳ.유목형 군주하의 호한세력의 추이
1.황위 계승 형식의 미정립과 군사 편제의 이중성
2.황제권의 독재화와 한인 문관의 은행화
Ⅴ.부패의 만연과 서역상호의 대두
1.부패의 만연
2.서역상호의 활동과 그 영향
본문내용
Ⅰ.머리말
-동위-북제는 강역·인구·경제력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유리한 조건을 구비했음에도 선비인과 한인을 조화시켜 하나로 묶으려는 뚜렷한 정책의 추진도, 성과도 없음
→40여 년 동안 호한 간의 충돌이 계속됨에 따라 국가의 역량이 분산 → 북주에 의해 멸망
-북제시대 서역상호 출신의 은행세력을 한인사족과 선비훈귀와 대등한 제3의 정치세력으로 보고, 북제의 멸망 원인은 은행이 ‘권력을 마구 휘둘러 정치를 해친’데 있다고 파악하는 견해도 있음
-필자: 북제 정치사를 살펴보면 호한 문제가 가장 기본적인 것, 은행세력은 호한갈등의 전개 추이에 따라 부수적으로 등장한 세력이라는 것
-동위-북제사의 전개는 한화세력과 반한화세력 간의 갈등에서 비롯
-그 밖에 발생하는 여러 세력의 이합집산 문제는 호와 한의 반목에서 부수적으로 비롯된 것
Ⅱ.호한갈등의 소재
1.‘한화’와 ‘반한화’ 세력의 대립
-종족 성분을 따지자면 복잡한 구성, 100여 년을 같이 잡거한 후 여러 방면이 선비인과 동일
∴‘육진선비’, ‘북인’으로 통칭되는 이들과 ‘하남낙양인’이 된 ‘대천호’와는 문화적으로 엄밀히 구별
-육진선비는 그 문화에 기반한 강력한 종족의식을 보유
·‘한가성질’과 분명히 구별되는 ‘선비특질’을 지키고 있었던 것
-육진의 난은 낙양 조정의 냉대(효문제의 한화정책) 받은 진민의 반발에서 비롯
·육진의 난 자체는 실패 → 그 후 육진인 대부분은 하북으로 남하 → 반란군 참여
·이 때 반란집단 내에서 호한갈등 문제가 싹트기 시작
·유민의 이동 과정에서 호한갈등이 심화 → 신정권 창출 과정에 중요한 변수로 부각
-북위 조야에서 호한갈등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사례: ‘하음의 변’
·육진 진민들의 낙양조정에 대한 반감이 그대로 표현
-하북 한인대족들이 취한 대응 방식은 저마다 다름
·한인세력은 애초에는 북위정부를 유지 보호하는 쪽 → 그러나 반란군 세력에 증가로 거짓으로 반란군에 투항하는 경우도 발생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