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안과 의화단 (요약정리)
- 최초 등록일
- 2020.06.01
- 최종 저작일
- 20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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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 리 말
Ⅱ. 19세기 후반의 ‘교안’ 반기독교운동
1. 교회세력의 확장과 ‘민교’대립
2. 반기독교운동의 전개양상
3. 주도세력의 전이와 지도이념의 전변
4. 교안의 처리과정
Ⅲ. 의화단운동
1. 의화단의 ‘원류’와 산동성
2. 의화단 세력의 확대와 청조의 태도
3. 열강의 대응과 동남호보
4. 의화단운동의 좌절과 신축조약
IV 맺은 말
본문내용
Ⅰ. 머 리 말
중국근대사의 전개에 대해 성격을 규정한다면 제 1차 중영전쟁 이래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이라는 외부적 도전에 대해 청 중기 이래 확대 심화되어 온 국내의 여러 모순을 배경으로 중국의 역사주체들이 대응해 간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교안과 의화단운동은 전개된 시기와 지역이 길고 넓을 뿐 아니라 중국 근대의 모든 역사주체를 직간접으로 포괄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대상이었다. 또한 민중적 응전이란 성격 때문에 태평천국운동과 함께 중국근대민중운동사의 중심적 연구대상이기도 하다. 중국근대사를 이해하는 또하나의 접근방식은 서구의 충격과 그에 대한 동아시아의 대응을 추구하는 흐름이다. 이 관점은 교회와 선교사를 서구 기독교문명의 대표로 간주한다. 따라서 중국에서 일어난 여러 문제를 유교와 기독교의 충돌로 해석한다. 이러한 마찰 위에 불평등조약체제가 가로놓여 있었고 그 처리는 중외관계로 가능했다.
Ⅱ. 19세기 후반의 ‘교안’ 반기독교운동
1. 교회세력의 확장과 ‘민교’대립 기독교는 그 지파인 네스토리우스파가 당나라 초기에 경교란 이름으로 전파된 뒤 오랜 전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중국의 역사 전개에 큰 의미를 띠게 된 것은 제1차 중영전쟁의 패배로 청나라가 기독교 선교를 허락한 이후이다. 당시 선교사들은 서구인 중에서는 비교적 중국의 사정에 밝았기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본국의 대 중국정책에 직간접적 연관을 맺었다. 특히 조약의 기초 작업과 번역, 통역은 주로 선교사의 몫이었다. 선교사 중에는 제1차 중영전쟁을 기독교 선교의 일대 전기로 보아 환영하고 편승한 자도 적지 않으며 또한 서구 열강도 그들을 중국 침략의 포석으로 활용하였다는 혐의를 면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중미의 망하조약과 중불의 황포조약은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교회 건립과 청정부의 교회보호의무가 규정되었다. 영국과 달리 프랑스는 가톨릭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