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묘청과 김부식
- 최초 등록일
- 2003.11.10
- 최종 저작일
- 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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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묘청과 김부식에 대해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비교했습니다. 교수님께 칭찬받은 레폿이에여~~
목차
서론
1. 들어가는 말
본론
1. 당시의 국내·외 정세
2. 서경의 등장 - 서경천도 논의의 전개
3. 김부식의 반격
4. 묘청의 난
5. 묘청의 난에 대한 평가
결론
묘청과 김부식의 대립에 관한 평가
오늘날 정세와의 비교 및 고찰
본문내용
고려 중기인 1135년, 묘청 일파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김부식이 총사령관이 되어 1년여 만에 진압했다. 이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단순한 권력투쟁인가. 아니면 정책대결 끝에 빚어진 무력충돌인가. 단재 신채호가 이 사건을 자주와 사대주의의 갈등으로 파악한 이래, 그렇게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묘청과 김부식이 라이벌 관계였던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를 자주파와 사대파의 대립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국내정치에 대한 외세의 작용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며, 정치적 야심이나 질투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역사적 사건의 본질을 개인의 심리적 차원 문제로 축소하는 것이다.
그 무렵 고려왕조는 사회변동기에 접어들고 있었으므로 뜻 있는 이들이라면 나름대로 개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묘청과 김부식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묘청은 풍수도참설에 바탕을 두고 천도 등의 비상한 조치를 수반한 제도개혁을 주장했으며, 김부식은 유교에 바탕을 둔 합리주의적 개혁을 주장했다. 이들의 라이벌 관계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이들의 사회개혁안과 정치관, 문학관 등의 차이를 살펴보도록 하자.
1. 당시의 국내·외 정세
1126년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은 일단 진압 되었으나, 인종 때의 국내외 정세는 매우 불안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