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혜무염의 활동과 성주산파; 득난
- 최초 등록일
- 2018.10.29
- 최종 저작일
- 20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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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낭혜 무염과 성주산파
1) 낭혜 무염의 생애
2) 성주산파
3. 백월보광탑비 비문과 득난
4.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나말여초라고 불리는 신라 말 고려의 초기에는 많은 사회변동이 존재했다. 신분의 한계로 인해 사회에 진출하지 못 하는 사람들의 불만이 극을 달한 시점이었다. 또한, 신라 말기 이전까지는 교종 중심으로 한국 불교사가 이루어지다가 이 시기에 선종이 유행하며 사회의 변동이 있었다. 성주산문의 고승인 낭혜 무염의 탑비는 생생한 역사자료로서 있기 때문에 성주산문은 많은 이들의 연구 호기심을 자극했다.
낭혜 무염은 신분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던 사람으로 다른 이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고, 북종선, 남종선, 그리고 화엄까지 전부 다양하게 아우르던 사람이다. 그가 그렇게 아우르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그의 생애와 그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성주산문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당시의 낭혜 무염에 대해 작성된 비문에 의해서 밝혀진 사회적 신분인 ‘득난’도 알아보도록 한다.
2. 낭혜 무염과 성주산파
1) 낭혜 무염의 생애
낭혜(801년-888년)는 신라 후기의 승려로 법명은 무염이다. 달마대사의 10대 법손이며 할아버지는 진골 출신이다. 고조와 증조는 모두 장수와 재상을 지내 유명한 집안이었으나, 아버지가 진골에서 한 등급 강등하여 6두품으로 되어버리는 바람에 그는 출세의 길이 막히게 되었다. 무염의 가문이 강등된 이유는 많은 추측이 있는데 제일 가능성이 높은 추측으로는 아버지 범청은 사병을 거느렸지만 김헌창의 모반과 함께 묶이어 곤란한 정치적 입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입산과 6두품으로의 강등을 당했다는 것이다. 또한,그의 외가의 신분도 사회적 제약이 되었다. 무염의 어머니는 성이 화씨로 높은 신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염의 가문은 아버지 범청 때 몰락하였지만 대대로 명문이었고, 이러한 특이성은 무염의 사회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 ‘해동신동’(海東神童)이라 불리다 12세에 본인의 출신으로 인한 사회적 제약을 깨닫고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출가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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