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의 역사 보고서
- 최초 등록일
- 2016.01.18
- 최종 저작일
- 20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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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본론
3. 결론
4. 참고문헌
본문내용
통신은 먼 옛날에서부터 지금까지 꼭 필요한 수단이다. 글이 없었던 선사시대에는 벽화를 남겨 옛 풍습이나 생활모습을 알렸고 글이 생겨나고 나서는 책, 편지 등으로 서로의 말을 주고받았다. 또한 편지 등을 말을 타고 장거리 까지 전달하기도 했다. 연기로 소식을 전하는 봉수제도 전시에 사용되었다. 또한 전화의 발명으로 사람들은 편하게 멀리 있는 사람들과도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전화의 발명은 무궁무진하게 쭉 이어진다. 전화기의 선은 없어져 무선으로 전화가 되고, 무선이 된 휴대전화의 크기는 점점 줄어들어 손바닥 안에 들어갈 만큼 작아졌다.
<중 략>
고려시대에는 우역 또한 이어져 왔다. 궁예의 후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는 우역에서도 이를 계승하였고 삼국을 통일한 이후 6과 체제이며 전국을 6개의 역로로 나누어 151개의 역을 설치해서 독자적인 역제를 완성해 나갔다. 1과는 개경과 서경을 연결하는 12개 역으로서 태조 이래 개척된 여러 고을을 고려의 중심권으로 다지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2과는 993년(성종 12년)에서 1014년(현종 5년) 사이에 설치된 14개 역으로서 그 소재지는 8개 읍에 분산되어 있는데, 북계의 안부대도호부 영주의 관내였던 것으로 보아 2과의 역들은 북계의 개척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3과는 22개 역인데, 그 소재지는 14개 읍에 분산되어 있다. 그런데 비교적 동계에 집중되어 있었고, 방어주에 설치된 것으로 보아 대 여진 정책과 관련된 것 같다고 볼 수 있다.
<중 략>
거기다가 광해군도 몰아냈었으니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하지만 도망간 인조에게는 어떤 일이든 명철하게 분석하고 해결하는 장수들이 많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괄의 자만심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 당시에 도원수 장만을 비롯하여 부원수 이수일과 남이흥, 정충신들 명장들이 인조를 따르고 있었다. 이 정충신이 이괄의 난에 결정적인 인물이다. 정충신은 지원군이 오는 와중에 백성들의 마음이 이괄 쪽으로 기울 것을 염려하여 도성을 압박할 안현을 우리 쪽으로 만들자고 주장하였다. 정충신은 안현에 가서 가장먼저 봉수대를 접수하였다.
참고 자료
진용옥, 봉화에서 텔레파시 통신까지 : 정보와 통신의 원형을 찾아서,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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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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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 교육학연구 2001. 5호. p.218-p.239. 김일래, 봉수와 파발의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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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국, 전장에서 읽는 역사 인물과 사상에서 봉수는 어떻게 시작 되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