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의 이해 2차 예송논쟁 - 갑인예송
- 최초 등록일
- 2015.06.15
- 최종 저작일
- 20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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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2차 예송논쟁인 갑인예송에 관한 글입니다.
목차
1. 갑인예송의 주요인물
2. 갑인예송의 쟁점 & 일지
3. 나의 의견
본문내용
2차 예송은 1674년에 발생하였다. 갑인예송은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죽자 조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벌어졌다. 1차 예송에서는 국제기년복이 채택됨으로써 기년복(1년)을 입었고, 효종의 장자 ·차자 문제가 애매하게 처리되었다. 하지만 인선대비가 죽으면서 이 문제가 다시 표면으로 떠올랐다. 즉 효종을 장자로 인정한다면 인선대비는 장자 부이므로 대왕대비는 기년복(1년)을 입어야 하지만, 효종을 차자로 볼 경우에는 대공복(9개월)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예조에서는 처음에 기년복으로 정하였다가, 다시 꼬리표를 붙여서 대공복으로 복제를 바꾸어 올렸다. 현종은 예조에서 대 공복제(9개월)를 채택한 것은 결국 효종을 차자로 보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잘못 적용된 예제로 판정하였다. 이후 송시열을 대표하는 서인세력이 대대적으로 정계에서 축출되고 나서 결국에는 남인정권이 들어서는 계기를 이루었다.예송논쟁은 사상적으로 서인계열과 남인계열 사이의 왕세자가 배우는 학문의 전통 차이가 내재되어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정국의 변동을 가져오는 등, 예학 자체의 문제를 넘어서는 중요한 사건이다. 2차 예송논쟁의 경우 현실적으로는 1차 예송논쟁보다 서인 송시열의 계열뿐만 아니라 비송시열 계열, 남인세력, 왕실의 입장 등 다양한 변수와 상황이 이뤄지는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었지만, 여전히 1차 예송에서의 왕세자의 학문 중 의복상의 문제가 논쟁의 본질을 이룬다. 이것은 곧 17세기의 경우 서인세력과 남인세력 내에서 의견이 충돌됐던 예학적 ·학문적 특성이 현실적인 권력상의 복잡한 여러 변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송논쟁의 전개과정에서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미 깊은 곳에서 움직임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서인은 김장생으로부터 이어지는 예학적 전통 속에서 주자학을 절대 신봉하는 반면, 근기남인(경세치용의 학풍을 특색으로 하는 근기 지방의 남인)학파는 원시유학인 육경을 중시하면서 고학(옛학문)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경향을 가졌으며, 이러한 경향성은 권력구조의 측면에서도 각각 신권 중심, 왕권 중심의 두 경향을 띠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