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임진왜란의 발발
1. 임진왜란(壬辰倭亂) 전의 조 ? 왜의 정황
1) 임진왜란(壬辰倭亂) 직전의 조선의 상황
2) 임진왜란(壬辰倭亂) 직전의 왜의 상황
2. 임진왜란 직후의 조선
Ⅲ. 광해군과 임진왜란의 관계
1. 광해군의 생애
2. 광해군의 분조활동
3. 광해군과 무군활동
1) 무군사를 통한 활동
2) 군무총독 문제
4. 선조의 내선문제
5. 그 밖의 왕자들의 활동
Ⅳ.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머리말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선조(宣祖) 25년(1592)4월~선조(宣祖) 31년(1598)11월까지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조선왕조 최대의 국난이었다.
임란 초 2개월간은 부산에서부터 서울과 평양까지 차례로 왜군의 점령지가 되었다. 이는 왜군을 막지 못하고 연패하여 그렇게 쉽게 평양까지 몰리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선조(宣祖)는 급급하게 한양을 버리고 멀리 의주까지 파천을 해야만 하였다.
당시 조선 사회는 오랜 평화 기간에 접어들어 전쟁의 심각함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임란이 발발하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제와 더불어 당시 조선 사회의 모든 문제는 조금씩 무너져 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는 임란이 발발하고 그대로 폭발하여 걷잡을 수 없게 만든 요인이었다.
이 당시 선조(宣祖)를 비롯한 집권층은 전쟁의욕을 상실한 채 피난에만 신경을 쓰고 이와 같은 난국을 극복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요동지방으로 도망하여 명에 내부할 것만 생각하였던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
<중 략>
순화군도 임해군과 더불어 근왕병을 모집하러 강원도로 갔으나 일본군에 쫓기어 7워에 회령에 이르렀다. 여기서 그는 임해군과 마찬가지로 조신하지 못한 행실로 인심을 잃고 있었다. 그리고 수령을 닦달하고 사나운 하인들을 풀어 백성을 노략질 했다.
두 왕자가 잡혀 포로가 되자 선조(宣祖)는 그를 탈출시킬 계획을 강구(講究)하게 하였다. 광해군도 선조(宣祖) 25년 9월 8일에 선전관 김극성 등을 보내 두 왕자를 구출하도록 시켜 강원도 순찰사에게 계책을 다해 두 왕자를 구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 문제는 명 ? 왜 강화회담에 까지 끌고 가게 되었고 커다란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선조 25년6월 소서행장의 제의에 의하여 대동강 상에서 이덕형과 유천조신의 휴전회담이 이루어 진 뒤 8월에 심유경과 일본군의 회담이 평양에서 성립되어 평양 북방 부산원에 말뚝을 세워 이를 경계로 하는 휴전협정을 맺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3월 다시 열린 용산회담의 결과 일본군은 서울에서 남해안으로 철수하고 포로가 된 임해군과 순화군을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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