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천추범
- 최초 등록일
- 2012.06.09
- 최종 저작일
- 2011.09
- 11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3,200원
소개글
민영환 특사 일행의 파견 배경과 일행단, 여정, 서구인식, 시찰, 성과 등 민영환의 해천추범에 관한 글
목차
Ⅰ. 들어가며
Ⅱ. 민영환특사 일행의 러시아 파견 배경
Ⅲ. 민영환특사 일행단
Ⅳ. 여정
Ⅴ. 서구인식
1) 동양의 근대화에 대한 인식
2) 서양의 근대화에 대한 인식
Ⅵ.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찰
Ⅶ. 외교교섭과 성과
Ⅷ. 나가며
본문내용
Ⅰ. 들어가며
‘해천추범’이란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라는 뜻으로, 1896년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로 임명된 민영환(閔泳煥)이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Aleksandrovich Nikolai II)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기행일기문의 제목이다.
19세기 말 조선의 정세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장(場)이었다. 조선은 난국(難局)을 타개할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때마침 조선은 러시아로부터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초청을 받았다. 그리하여 특명전권공사가 된 민영환은 중대한 임무를 띠고 러시아로 떠났다. 그의 임무는 조선이 직면한 문제를 러시아 정부와 외교협상을 통해 해결하는 것과 서구의 선진문물을 고찰하여 조선을 근대화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본 발표문에서는 민영환의『해천추범』을 중심으로 특사 민영환의 근대문물 시찰과 외교교섭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와 더불어 러시아로 향하는 여정에서 서구 근대국가를 본 민영환의 근대화 인식에 대해서도 다루어 보고자 한다.
<중 략>
러시아는 고종의 경비병을 파견하는 대신 군사고문을, 차관을 제공하는 대신 재정고문을 파견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었다. 즉, 조선의 요구에 대해 러시아는 전면 수용하지도, 전면 거절하기도 않는 애매한 결론을 내린 것이다. 러시아는 조선의 요구를 거절할 경우 조선이 자신들로부터 이탈할까봐 우려하였다. 그래서 후에 조선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한편, 러시아는 군사고문으로서 1896년 8월 스트렐비츠키(Strel`bitskii)대령을 서울에 파견하였다. 뒤이어 푸차타(Putiata)대령 외 13명의 교관단이 민영환 일행과 함께 1896년 10월 21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푸차타 교관단은 1개 대대의 병력 800명을 선발하여 궁궐을 경비하게 될 정예부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정예부대에게 구식 소총 대신 러시아에서 들여온 베르당(Berdan)소총을 지급하였다. 그리하여 궁궐 경비병의 창설과 훈련은 러시아식을 따르게 되었다. 새로 선발된 군인들은 보초임무와 분대·중대·대대 단위의 훈련 및 소총 사격술을 배웠다.
참고 자료
조재곤, 『해천추범-1896년 민영환의 세계일주』,책과함께, 2008.
국사편찬위원회, 『윤치호일기』4 ,탐구당 1971.
서재길책임기획, 규장각한국연구원 엮음, 『조선사람의 세계여행』,글항아리, 2011.
고병익, 「러황제대관식에의 사행과 한러교섭」,『역사학보』28, 역사학회, 1965.
김진영, 「조선 왕조 사절단의 1896년 러시아 여행과 옥시덴탈리즘」,『동방학지』131,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 2005.
김진영, 「조선 왕조 사절단의 1896년 러시아 여행과 옥시덴탈리즘」,『동방학지』131, 2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