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항쟁 (고려) 고려 몽고
- 최초 등록일
- 2011.12.01
- 최종 저작일
- 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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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중세사 수업의 레포트 보충자료입니다. 여몽항쟁에 대한 지료!
목차
1. 들어가는 말
2. 몽고의 등장
3. 여몽전쟁Ⅰ - 12차 침입
1)1차 침입
2)귀주성과 안북부 싸움
3)2차 침입
4)3차 침입
4. 여몽전쟁Ⅲ - 4~6차 침입
1)4차 침입
2)5차 침입
3)6차 침입
5. 고려의 대응
6. 삼별초항쟁
7. 몽고 침입 그 후
8. 나가는 말
본문내용
몽고군이 철수하였지만 그 가혹한 요구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고려 조정은 장기항쟁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1232년 2월부터 부단히 대책을 숙의한 끝에 6월 16일 천도를 결정하고 개경의 백성을 강화도로 이주시키기 시작하였다. 또한 서북 지방의 몽고인 다루가치를 축출하거나 죽음으로써 몽고와 일전불사의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살리타이는 1232년 8월 기병 1만여 명을 이끌로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몽고군은 개경 부근으로 남하하여 부대를 4개로 나누고 한 부대는 강화도와 다른 지역의 연락을 차단하게 하고, 두 개 부대는 강화도를 직접 공격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나머지ㅣ 한 부대를 직접 지휘한 살리타이는 남하하여 경기도 광주성을 포위하였으나 고려군민의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12월 16일 살리타이는 처인성 주변에 병력을 배치한 수, 대여섯 명의 경기병만을 대동한 채 정찰을 위해 성으로 접근하였다. 원래 처인은 특수한 신분의 천민들이 거주하는 부곡으로 처인성에는 승려 김윤후가 승병과 부곡의 천민들, 피난 온 이웃 고을의 고려군민들을 이끌로 있었다. 김윤후는 처인성 동문에서 300미터쯤 떨어진 곳에 병사들을 매복시켜 놓고 있었고, 마침내 살리타이가 그 그물에 걸려 들었다. 매복했던 고려군의 집중 사격으로 살리타이와 호위병들은 순식간에 죽음을 당하였고, 이를 구출하러 달려 나온 몽고군 또한 고려군의 역습으로 태반이 죽고 다치는 피해를 보고 급히 용인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