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정권의 개혁정책과 농민군 대책, 논문분석
- 최초 등록일
- 2011.01.07
- 최종 저작일
-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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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 논문은 1894년 사회개혁적 두 운동인 농민전쟁과 갑오개혁의 대립원인을 일제의 개입에서 찾는 기존의 연구뿐만 아니라 갑오개혁과 농민군의 본질적인 의견차이와 방향에서 찾으려고 시도했다. 1894년 초 민란이 대규모로 발생하여 4월에는 전주성이 함락되기에 이르자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던 민씨정권이 붕괴되고 이어 국제적인 내정간섭을 초래하게 되었다. 청군과 텐진조약을 근거로 개입하려는 일본군 등을 막으려 정부와 농민군은 타협을 시도했다. 정부는 대경장을 펼치겠다는 약속을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농민군은 전라도 일대 집강소를 중심으로 폐정개혁을 독자적으로 시도하였다. 갑신정변 이후 개화파탄압이 농민군에 대해 옮겨지자 몇몇 개혁관료들이 5월 초부터 정치세력화를 이끌기 시작하였고, 개혁정권수립운동을 시작하였으나 농민군과의 연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취약한 국내기반을 일본과의 연계로 집권하려고 하였으며 국내전에 청일간의 대립으로 변하자 국내논쟁이 가열되기도 하였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이 논문은 1894년 사회개혁적 두 운동인 농민전쟁과 갑오개혁의 대립원인을 일제의 개입에서 찾는 기존의 연구뿐만 아니라 갑오개혁과 농민군의 본질적인 의견차이와 방향에서 찾으려고 시도했다. 1894년 초 민란이 대규모로 발생하여 4월에는 전주성이 함락되기에 이르자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던 민씨정권이 붕괴되고 이어 국제적인 내정간섭을 초래하게 되었다. 청군과 텐진조약을 근거로 개입하려는 일본군 등을 막으려 정부와 농민군은 타협을 시도했다. 정부는 대경장을 펼치겠다는 약속을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농민군은 전라도 일대 집강소를 중심으로 폐정개혁을 독자적으로 시도하였다. 갑신정변 이후 개화파탄압이 농민군에 대해 옮겨지자 몇몇 개혁관료들이 5월 초부터 정치세력화를 이끌기 시작하였고, 개혁정권수립운동을 시작하였으나 농민군과의 연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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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갑오정권의 개혁정책과 농민군 대책」에서 갑오개혁 그들의 ‘공약’이 가지는 농민군간의 대립요소를 찾으려 했는데 이는 각 주체가 어떤 의미를 가진 인물들이었고 그것이 미치는 개혁의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였으며, 왜 그들이 근본적인 토지개혁을 하지 못한 것인지, 이후 신분개혁 후에 지주들과의 타협건 등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아쉽다. 그 외에도 갑오개혁을 분절적 사건으로 보고, 이후 정동파 등이 대한제국관료가 되고,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파악하지 못한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왕현종, 「 갑오정권의 개혁정책과 농민군 대책」, 『1894년 농민전쟁연구』4,
한철호,「갑오개혁 줃세력의 현실대응론」,『한국근대사연구』11,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