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르나르와 쉬제 아벨라르의 관계 분석
- 최초 등록일
- 2010.11.07
- 최종 저작일
- 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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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세시대 성직자
성 베르나르와 쉬제 아벨라르의 관계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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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성 베르나르는 부르고뉴의 귀족 출신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따뜻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자비, 정의, 타인에 대한 충실한 사랑이 몸에 배게 되었다. 신앙과 윤리를 중요하게 여겼으나 자신만 의로운 체하지는 않았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원숙하고 활동적인 시기는 1130~45년이었다. 그는 이 기간에 수많은 시민회의와 교회공의회, 교황청이 7년간 불화를 겪으며 벌인 신학 논쟁에서 중재자와 고문 역할을 하면서도 시간을 내서 〈구약성서〉 〈아가〉에 대한 방대한 설교를 남겼다. 그는 5명의 교황의 친근한 고문 역할을 하면서 대립교황들(유효한 성직임명 절차를 무시하고 교황에 선출된 사람들)로 인한 교회의 상처를 치유하고, 당시 가장 위대하고 인기있던 변증가 아벨라르의 합리주의적인 영향과 대결해, 대표적인 성직자들 사이에 우정을 두텁게 하는 일을 자신의 역할로 생각했다. 아벨라르와 몇 차례 접촉했으나 두 사람은 성격과 태도가 너무 달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립으로 끝나고 말았다. 베르나르는 수도원 영성학파가 전통적으로 `침묵을 통한 반대`를 해왔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벨라르의 변증법적 스콜라주의는 하느님의 신비를 땅에 떨어뜨렸으며, 스콜라주의 자체가 하나의 기교에 불과하다고 맹렬히 비판했다. 그리고 스콜라주의는 신앙의 영역 안에 머문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벗어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 후 베르나르는 아벨라르에 대해 승리를 선언했는데, 이것은 논쟁 기술과 설득력 때문이 아니라 설교를 통한 비판과 주교들 및 교황으로부터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아벨라르라는 인물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중세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신학자로, 중세 철학사 전체를 지배한 보편 논쟁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흔히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아벨라르는 1079년 프랑스 서부의 도시 낭트 인근 르팔레라는 곳에서 영주이자 노트르담 대성당의 수사신부를 지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유산과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기사직을 포기한 뒤 파리로 가서 철학 특히 논리학을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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