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
- 최초 등록일
- 2010.10.28
- 최종 저작일
- 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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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을미사변에 대해 조사한 리포트이다.
을미사변의 배경, 개요, 의문점에 대해 서술하고
더불어 이 사건에 대한 일본인들의 생각또한 조사하였다.
목차
Ⅰ. 서론
Ⅱ. 을미사변 이전 조선의 시대상황
Ⅲ. 사건의 개요
Ⅳ. 일본정부 개입설
Ⅴ. 을미사변에 대한 일본인의 생각
본문내용
<서론>
조선말기 고종의 왕비로 보통 민비 라고 불리는 명성황후는 1851년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하였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으로 가난하게 자랐고, 소녀시절부터 집안일을 돌보는 틈틈이 춘추를 읽을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1866년 흥선 대원군의 부인의 추천으로 16세에 왕비가 되었지만 고종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신이 낳은 첫 번째 왕자를 5일 만에 잃는 등 어려운 상황을 맞았다. 수완이 능란한 그녀는 왕실정치에 관여하였고, 일생을 두고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정치적 대립으로 각기 불행을 겪어야만 했다. 1895년 8월에 일본군대와 정치낭인들이 흥선 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하는 을미사변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명성황후는 나이 45세로 일본인의 손에 살해되고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마쳤다.
<본론>
1. 을미사변 이전 조선의 시대상황
청일전쟁의 종결과 함께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본격화된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은 이후 러일전쟁까지 약 10년간 지속되었다.
청일전쟁을 마무리 짓는 강화조약이 체결된 것이 4월 17일. 청으로부터 천문학적인 배상금과 함께 요동반도와 대만 등의 영토까지 할양받은 일본 전국은 온통 승전의 환희로 불타올랐다. 그러나 불과 엿새 뒤인 4월 23일 러시아와 독일과 프랑스 3국이 나섰다. “요동반도를 청에 돌려주라.” 국제적 압력에 밀린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납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최근세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역사로 꼽히는 이 삼국간섭이라는 사건으로 인하여 일본이 잃은 것은 요동반도만이 아니었다. 국가적 체면도 국민적 자신감도 잃었고, 권위와 위엄도 잃었다. 그런 현상은 즉각 대외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삼국간섭 이후 명성황후는 친러 정책을 강화하고 인아거일(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의 침략에 대항한 것)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군주권 강화라는 당면목표를 달성하려는 명성황후가 이미 삼국간섭으로 약세를 노출시킨 일본세력을 배척하는 한편 그 간섭을 주도한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독립을 유지하려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