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한국 최초의 페미니스트
- 최초 등록일
- 2010.10.18
- 최종 저작일
- 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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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한국 최초의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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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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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전기
나혜석(羅蕙錫, 1896. 04. 28 - 1948. 12. 10)은 한국 최초의 여성 유학생이며,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이고, 또한 한국 최초의 페미니스트 여성운동가이다. 그녀는 또한 독립 운동가이고, 여류 소설가 겸 시인으로서, 한국인 최초로 세계 일주를 했던 여걸이고 또한 서양화로 최초의 서울전시회를 개최한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세계 초유의 <이혼고백서>를 발표한 여성이기도 하다. 그녀의 시대는 조선조 말기 한일합방 직후로서 지금부터 한 세기 이전의 일들이다. 나혜석은 18세의 어린 나이에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면서 당시에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던 여권을 주창한 역사적 인물이며, 3.1운동에 가담하여 5개월간 옥고를 치른 여성 독립 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필력과 명성으로 일거수일투족이 항시 신문 기사화되었던 당대의 여걸이었다. 그러나 1927년 파리에서 최린과의 염문설로 1930년 김우영과 이혼하면서 삽시간에 버림받은 여인이 되었다. 세계 역사상 초유의 <이혼고백서>를 발표하면서 4남매의 자식들에게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며 인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유언을 남겼다: “4남매 아이들아 너희들이 외교관이 되어서 프랑스 파리에 오거든 에미 무덤에 장미 한 송이를 꽂아다오. ...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거라. 너의 에미는 과도기의 선각자로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드니라.” 그러나 그는 파리에서 생을 마감하지 못하고 수덕사, 마곡사, 해인사, 다솔사 등 국내의 여러 절에서 승려 아닌 수도생활을 하였고, 그 뒤로 양로원과 보육원을 전전하다가 서울 용산구청 자리의 서울시립 자제원에서 이름 모를 잊혀진 여인, 행려병자로 사망처리 되었다.
1995년 10월 나혜석 탄생 100주년을 맞이했으며, 2000년 2월 문화관광부 선정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새천년 여성최초의 문화인물이 되었다. 1996년 나혜석의 생가터 10여 평을 찾아 생가터비를 세우기로 추진하고, 1995년 미술의 해에 정부와 미술의 해 조직위원회에서 마련한 기념표석을 그 자리에 안치하고 생가터 일대 약 300평에 생가복원과 기념관 건립을 계획 중이다
참고 자료
라혜석, <원본 정월 라혜석 전집>, 나혜석기념사업회 간행, 서정자 엮음 (서울: 국학자료원,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