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사례 및 새로운 사례
- 최초 등록일
- 2010.06.15
- 최종 저작일
- 2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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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주영 사례 및 새로운 사례
목차
1. 정주영 소개
2. 현대 조선소 설립 에피소드
3. ㈜한국 화이바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본문내용
1915년 11월 22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210번지 출생
6남2녀 중 장남으로써 책임감 을 지니고 있었음.
현대 자동차 공업 대표
현대건설 사장
현대조선중공업 사장
13,14,15,16,17대 경제인 연합회 회장 역임
14대 국회의원
현대 그룹 명예회장
500마리 소와 함께 북한 방문
2001년 3월 21일 노환으로 별세
현대 조선소 설립 에피소드
정주영에게 조선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회사였다. 배를 만드는 일이 위험부담은 크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업종이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 전체의 국민 경제를 생각하고 내린 결단이었다.
조선소 건설에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처음에 정주영은 일본의 미쓰비시 상사에 차관을 의뢰했다. 그러나 그 당시 중국과의 수교를 눈앞에 두고 있던 일본의 사정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다. 자본 유치를 위해 유럽 쪽을 찾아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현대 조선소 설립 에피소드
1971년 9월 정주영은 영국의 바클레이즈 은행에 갔지만 매번 문전 박대였다.
결국 정주영은 런던의 「A&P 애플도어」라는 회사에 기술 용역을 맡기기로 계약을 할 때 애플도어사의 회장 (롱바톰 회장)에게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로 설득한 결과 감동받은 롱바톰 회장은 그 회사의 추천서를 버클리 은행에 제출했다.
현대 조선소 설립 에피소드
난관도 많았다. 영국 은행이 외국에 차관을 주려면 영국 수출 신용 보증국의 보증을 받아야 한다. ECGD에서는 배를 살 사람이 있다는 증거를 가지고 와야 승인을 내주겠다는 것이었다.
영국의 기술 회사가 현대의 기술력을 인정 했고, 세계 5대 은행의 하나인 버클리 은행도 현대의 능력을 인정을 했으나, 신생 조선소에 배를 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 5만분의 1 지도 1장, 스코트리스고우사에서 만든 26만톤짜리 유조선 도면 1장이 전부인 그는 만들지도 않은 배를 팔러 다니는 ‘봉이 정선달’ 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현대 조선소 설립 에피소드
이러한 난관을 해치고 그리스 선사인 ‘선 엔터프라이즈’사의 리바노스 회장을 설득하여 25만 9천톤급 초대형 유조선 2척을 수주함으로서 조선소 설립을 위한 차관 도입을 마침내 성공.
울산의 현대조선소는 2년 3개월 만에 조선소를 준공하며 방파제를 쌓고, 14만 평 규모의 공장을 짓고, 근로자 5천 명이 살 수 있는 집을 짓고 리바노스가 주문한 유조선을 포함해 12척의 유조선을 완공되기 전에 완성 되었다.
㈜ 한국 화이바 불가능을 현실로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