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와 인도의 독립운동
- 최초 등록일
- 2009.12.04
- 최종 저작일
- 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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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도의 역사 중에 간디와 인도의 독립운동 그리고 모슬렘 민족주의와 인도 파키스탄의 분립 부분을 다룬 내용으로 `인도사`책을 요약한 발제문입니다.
목차
1. 간디와 인도의 독립운동
2. 모슬렘 민족주의와 인도 파키스탄의 분립
본문내용
간디와 인도의 독립운동
인도 국민회의에서 온건파와 과격파의 대립은 1917년 국민회의 의장 선출을 둘러싸고 표면화 되었다. 안니베잔트를 의장으로 선출하는 것에 대해서 최종 선출권을 갖고 있는 중앙의 접대위원회에서 두 파는 대립하였다. 안니베잔트의 의장 선출이 확정되자 온건파는 퇴장해 따로 회합을 갖고 국민자유연맹이란 단체를 결성하였다. 10여년전 온건파는 소수의 행동이 국민회의의 활동에 유해하다는 이유로 과격파를 축출하였지만 이제 소수인 자신들의 견해가 무시당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국민회의를 탈퇴하고 만 것이다.
간디가 온건파의 지도자인 고칼레와 과격파의 지도자인 티일락의 어느쪽을 계승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한마디로 확정적으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간디는 불과 3년 연상이었던 고칼레를 자신의<정치적 스승>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간디는 고칼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투쟁에 임하는 모습에서 스승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 또한 간디는 고칼레의 제자로 자처했음에도 티알락을 찬양하였다. 간디는 티알락의 사생활의 순수성과 희생정신을 흠모했다. 간디와 티알락은 스와라지(자치)를 강조하고 이를 국민에게 가르치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를 통해 봤을 때 이후의 간디의 위력적인 독립운동은 고칼레와 티알락의 영향에 그의 투쟁 전략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간디는 구자라트 지방에서 제3계급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토후의 수석장관으로서 간디는 런던에서 3년 수업을 마친 후 변호사로 출발하였다. 처음에 간디는 1년 계약으로 남아프리카의 인도인을 위해서 갔지만 동족의 비참한 인종적 차별대우를 외면할 수 없어서 그 곳에 20년동안이나 머물렀다. 인도로 다시 돌아왔을 때 간디는 고칼레의 조언에 따라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인도 각지를 여행하고 대학 등에서 남아프리카의 경험에 대한 강연에 몰두하였다.
참고 자료
인도사/조길태/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