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현장을찾아서) 교재 제4부 ‘근대화와 도시의 변모’를 참고하여 자신의 거주하는 지역을 답사하면서 근현대시기동안 변모의 흐름을
- 최초 등록일
- 2021.08.13
- 최종 저작일
- 20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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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 교재 제4부 ‘근대화와 도시의 변모’를 참고하여 자신의 거주하는 지역을 답사하면서 근현대시기동안 변모의 흐름을 찾아볼 것.
2. 답사를 하기 어려운 경우 교재 제 4부에서 사례로 든 인천, 대전, 대구 세 도시의 근대화시기 변모의 양상을 비교할 것.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인천의 근대화 시기
1) 인천의 개항
2) 1883년 인천개항 및 전관조계의 설정
2. 조계 설정
1) 인천 제물포의 개항 당시
(1) 조계의 제한과 권리
(2) 일본 조계의 변천
2. 대구
1) 대구의 근대화 시기
3. 대전
1) 대전의 근대화 시기
4. 인천, 대구, 대전의 비교
III. 결론 및 의견
IV. 참고문헌
본문내용
I. 서론
19세기 후반경 제국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식민지 쟁탈전을 위하여 탈아입구를 외치던 일본제국은 조선이 자신들과의 수교를 거부하자 이에 대한 명분으로 한반도 침략을 위한 정한론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러시아는 남하 정책을 통하여 한반도의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선은 러시아와 일본의 맞설 힘이 부족하였고, 일본은 인접지역에 다른 열강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하였다.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과의 권력 다툼으로 인하여 초기에는 친일 개화파를 지원하였지만, 실권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청나라의 병력을 활용하여 탄압에 성공하게 된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은 이후 일본은 조선을 장악하기 위하여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1894년 청일전쟁,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한반도에 대한 침략을 가시화하기도 하였다. 결국 1909년 조선의 흡수가 일본 내각에서 결정되면서 1909년 10월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총살하였지만, 이 사건을 명분으로 삼아서 일본 안에서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의 합병에 대하여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병합의 추진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1910년 8월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고 대한제국은 멸망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한반도는 일본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당시 입론은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대한제국의 황제를 이왕으로 낮추어 불렀으며, 한반도 지역 전체가 일본의 식민지화 되어 식민정부인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식민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이번 주제를 통하여 인천과 대구, 대전의 근대화 시기에 대하여 살펴보고, 세 도시를 비교해보려 한다.
II. 본론
1. 인천의 근대화 시기
1) 인천의 개항
1876년 2월 경 조선은 일본과의 ‘조일수호조규’ 채결로 인하여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자본주의 질서에 편입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입장에서는 해외시장의 확보 및 대륙 침략 교두보의 마련을 위하여 조선을 침략 하는 것에 노력을 기울였다.
참고 자료
2020년 2학기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교과서
인터넷 검색 나무위키 일제강점기
https://ko.m.wikipedia.org/wiki/일제_강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