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사상 위정척사사상
- 최초 등록일
- 2011.06.22
- 최종 저작일
- 2011.06
- 3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근대화 추진 과정에서 개화사상과 위정척사사상
목차
없음
본문내용
근대의 시기에 등장한 사상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개화사상과 이 개화사상과 대조적인 위정척사사상이 있다.
1870년대를 전후로 해서 어떤 근대사회를 만들어 갈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완 이념 사상이 개화사상, 위정척사사상이다.
개화사상
개화란 새로운 것은 개발하고 백성을 교화한다라는 의미이다. 이 개화란 말은 1880년대에 들어 사용된 용어로 원래 일본에서 유래된 말이다. 개화사상을 가지게된 요인으로는 외적요인과 내적요인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외적요인은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개화사상을 가지게된다. 내적요인은 실학사사상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실학사상 중에서도 중상학파인 북학사상을 계승하였다. 실질적으로 북학사상과 개화사상은 외부의 문명을 수용하자는 것은 같은 맥락이지만 그 대상이 청과 서양으로 각각 서로 다르다. 이러한 북학사상에서 개화사상으로 전환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청나라가 몰락되면서 개화사상으로 전환되었다.
결국 우리나라는 1876년에 일본에 의해 개화를 하게 된다. 이에 민비를 중심으로 한 민비 정권이 개화정책을 주도해 나간다. 개화정책, 근대화 정책 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세력과 변화하지 않으려는 세력과 변화를 추구하는세력사이에 (진보와 보수) 마찰이 생긴다. 개화와 봉건이 붙게된 사건이 1882년 임오군란이다. 이사건 당시 민비 정권은 친청의 방향으로 가게 된다. 이러면서 기존의 개화 정책이 쇠퇴하게 되고 개화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발생한다. 민비 정권의 경우에는 청나라에기대어서 국내에서 자금을 확보해서 개혁을 추구해야한다 주장하였고 개화파사상은 청은 배척해야할대상이고 돈을 일본에서 빌려와서 이를 바탕으로 개화를 계속추진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개화파들의 의견을 따랐지만 일본도 한국의 개화를 지원할 정부재정이 튼튼하지 않았으므로 실패하게된다. 결국은 청에 더 의존하게 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키고 개혁을 빨리 진행시키기 위해서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정권을 장악해서 개혁을 빨리 추진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