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에서는 1918년 한인사회당이 만들어져 소련, 코민테른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 따라서 소련, 코민테른은 동아시아의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할 국제군을 시베리아에서 편성하는 것을 계획했다. ... 그리고 코민테른 제2차대회에서 “민족·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가 발표되는데, “세계 혁명을 위해서는 식민지·반식민지에서의 민족운동을 적극 지원해야한다”고 결정했다.
코민테른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조직을 해체할 것을 명령하고 국내에 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해 1922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코민테른 산하 코을 대중단체에 관철하기 위해서 프락치 조직을 ... 코민테른 기관에서 정식으로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결의했다는 기록도 없다. [12월테제]가 조선공산당의 재조직을 지시한 것은 조선공산당을 코민테른 지부로서 인정하는 것을 사실상 철회한다는 ... ‘코민테른에 제출할 국내정세보고’는 노동자, 농민계급의 동맹과 함께 농업혁명을 주장하였다.
스탈린에 의해 주도되는 국제공산주의운동(코민테른,일명 제3인터내셔널)은 중국혁명을 지도하였다. ... 이 같은 결과는 코민테른의 잘못된 판단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이 시점부터 마오쩌둥이 역사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한다. ... 스탈린은 중국의 현 사회발전 단계는 민족 부르주아 정당의 주도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따라서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판단에 따라 헤게모니를 포기하고 국민당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코민테른의 결정은 그 내부의 파벌투쟁에서 우세한 지위를 차지했던 스탈린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었다. 당시 코민테른내에는 중국 문제에 관하여 3개의 파벌이 있었다. ... 이러한 세 파의 논쟁은 1923년 1월에 열렸던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간부파의 주장을 채택함으로써 국공간의 제휴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3) 손문의 합작결정 국민당은 1922년
신간회(新幹會)의 성립 1) 신간회의 성립요인 (1)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 (2) 민족주의 좌파그룹에 대한 사회주의계의 긍정적 인식 (3) 코민테른의 전략적 의도 2) ... 제4차 코민테른의 “동양테제”는 그러한 인식 가운데서 나왔다. 1925년 4월 17일 화요회(火曜會)를 중심으로 해서 17여명에 의해 결성된 제부, 선전부 등 7개 부서로 두었다. ... 물론 레닌은 “코민테른은 식민지나 후진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파와 일시적 협정 또는 동맹도 맺어야 하지만, 그것과 융합해서는 안 되며 비록 맹아적 형태일지라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자주성을
하지만 1928년 코민테른 6차 대회 직후 지부 승인이 취소되었다. ... 제목 1928년 코민테른 8월 테제 이후 조선 공산당 재건을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연구 2. ... 하지만 그 활동은 앞서 코민테른에게 비판받았던 종파성과 분열성을 극복하지 못한 채 진행되었다.
코민테른과 피압박국가의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적 부르주아계급의 민족해방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그들과 반제통일전선을 모색해야한다. → 국공합작의 성립 : 5.4운동을 경험한 젊은 지식인( ... 지도부는 상해에 있었음 : 대중들의 무관심, 선전해야 겨우 움직임 → 국민당 정권은 농촌혁명근거지에 대한 대규모 토벌작전 수행(1~5차) → 초기 공산당의 한계: 지식인 중심 + 코민테른의 ... 1934년 강서소비에트 함락, 10월 16일 탈출(방어선 4차까지 뚫고 나옴) : 당시 지도부 = 박고(서열 1위), 주덕(최고사령관), 주은래(준의회의에 힘 싣어줌), 오토브라운(=코민테른
꼬르뷰로는 시베리아, 연해주 등지에서 러시아공산당과 연계를 갖고 활동하던 한인공산 세력과 코민테른 활동가의 연합체이다. ... 사회주의 운동의 전개 국외에서 한인사회당과 이후 고려공산당이 코민테른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하여 국내에 좌파세력을 대변할 전위당을 건설하기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왔다. ... 단체인 한인사회당이 창립 되었고, 이에 점차적으로 세력을 확장, 고려공산당으로 개칭, 상하이파의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의 고려공산당은 자파세력의 확산을 위해 나름의 활동을 펼쳤고, 코민테른과의
연합하여 혁명을 수행 -1920년 7월 코민테른 2차대회, 레닌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 →Maring이 창당대회에서 코민테른의 국공합작 방침을 수용할 것을 요구, Ⅳ. ... 강서시대(1931~1934) -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국공산당 제 6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코민테른은 이립삼이 트로츠키주의적인 원칙상의 과오를 범했다고 지적 -진소우(陳紹禹) ... 7월 상해에서 중국공산당 창당대회 개최 - ‘중국공산당의 하나의 강령(中國共産黨第’一個綱領) ‘, ‘중국공산당의 하나의 결의(中國共産黨第一個決議)’→무산계급의 자본가계급 타도, 코민테른과
바로 코민테른(comintern)이 후자의 목적을 위해 조직된 공산주의의 세계적 기구였다. ... 중국공산당은 손문이 코민테른과 합의한 중국 혁명의 성격을 중국 공산당의 당면 목표와 일치한다고 보았다. ... 코민테른의 지원에 의해 1921년 7월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이 창당됨으로써, 중국의 공산주의 운동은 국제공산주의 운동과 연계되었다. ?
소련유학파들은 국민당의 백석 테러에 대항하고 코민테른의 도시혁명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코민테른은 도시 혁명에 강한 집착을 보였고 국민당과 합작에 미련을 갖고 있었다. 이에 1923년 제1차 국공합작을 시도하는데 결렬 이후에도 여전히 노선을 유지한다.
임정은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위기를 타파하고자 했으나 곧 결렬되었고, 공산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지시로 민족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 소련에게 지원을 청하고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던 공산·사회주의 독립 운동가를 비난하고, 그들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뒤 코민테른의 지시로 상해로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의 조선대표도 겸직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에 제2차 조선공산당 조직이 일본경찰에 의하여 다시 해체되자 제3차당인 ... 다른 대표와 함께 보고하였다. 1924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공산주의 지도자 양성기관인 모스크바 동방지도자공산대학 단기과정을 이수하였다. ... 노동운동을 하였다. 1922년 소련령 웨르흐네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합동회의에 국내파 대표로 참가하여 공산당 파벌 통일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 뒤 통합대회 결렬사유를 모스크바 코민테른대회에
한편 7월부터 8월에 걸쳐서 모스크바에서는 코민테른 제7차 대회가 열려서 천사오위[陳紹禹:王明]가 중국공산당 대표로서 항일통일전선에 관하여 보고하고 있었다. ... 한쪽에서는 1920년대부터 동북지방에서 중국인·조선인 사이에 공산주의 운동이 시작되어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하는 중이었는데, 이들 조직은 1930년 중국 공산당 하부기구에 코민테른의
하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7월에 조직이 발각되어 사실상 붕괴 상태에 빠졌고, 결국 코민테른에 의해 해체되었다(12월 테제). ... 제1차 조선 공산당은 코민테른에 대표를 보내 승인을 얻었지만 신의주에서 청년 당원이 변호사를 구타한 사건을 계기로 조직이 탄로나 해체되었다(1925. 11.). ... 이 두 개의 고려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통합을 위한 지시와 조정에도 불구하고 끝내 불화를 극복하지 못하였고, 결국 해산되었다. 3·1 운동 이후 국내에서도 사회주의 사상이 진보적인 청년
또한 이르쿠츠크파의 코민테른 회의를 보고하기 위하여 대표자를 선정해 모스크바에 파견하였다. 양파의 보고를 접한 코민테른은 각파의 통합대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 이에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동휘가 레닌정부의 자금을 횡령하였다고 코민테른에 고소하였다. ... 그 후 회의장에 잔류하였던 상해파는 대회의 전후사정을 코민테른 파견원에게 보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