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적인 조선사회에서 을 쓴 이문건은 몇 살 때 치아가 났는지부터 시작해서 16살까지의 이수봉에 대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있다. ... 반면 이문건은 ‘성인군자‘를 목표로 교육을 시켜 잘못을 한경우에만 회초리를 들었고, 마음아파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강제로 이끌지 않았다. ... 양아록 (이문건 作 ) - 16세까지의 이수봉의 모든 것이 자필로 기록되어있다. 3) 사대부집안은 할아버지, 외할아버지가 교대로 손자의 교육을 담당했다는 것 가.
이문건의 양육 ... 이문건의 양아록을 읽고 나서 약 500년 전에도 육아일기가 있었다면 과연 믿을 수 있을까만은 묵재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이 쓴 양아록(養兒錄)이 바로 그것이다. ... 온 가족을 시켜(누이들, 할머니, 어머니, 이문건) 70대 이상이나 맞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때리고 난 후의 이문건의 심정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애통한 것이었다.
이문건은 조선 시대 문인이다. 이문건은 손자의 양육일기의 내용을 담은 『양아록』을 편찬하였다. 『양아록』에는 모두 37제 41수의 시가 실려있다. ... 조선의약생활사, 신동원 이처럼, 이문건은 천연두(두창)의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네 근처에서 두창이 발생하고, 이튿날 이문건의 집에도 두창이 퍼졌다. ... 이런 이숙길이 6세 때 천연두를 앓자 이문건은 「행역탄(行疫嘆)」을 지었다.
양반인 이문건은 손자인 숙길이 6세가 되자 글공부를 시켰다고 했으니, 이미 16세기 이전부터 6세가 되면 집안 차원에서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 아동의 기준은 여아와 구분되는 4,5세부터 14,15세까지의 아이들을 의미했고, 이문건의 에서는 아동기를 16세까지로 보았다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숙희는 할아버지 이문건의 유배지인 성주에서 태어나 6살인 어린 나이에서부터 언문 공부에 대한 의지를 내비친 총명한 인물로 이후 천자문, 삼강행실도, 소학 등을 공부하였다. ... 특히나 숙희의 할아버지 이문건이 삼강행실도를 교재로 선택해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효자도와 열녀도만을 숙희에게 가르친 부분에서 우리나라의 교육과 비슷하다고 느껴져 매우 안타까웠다. ... 주체로서 권위를 행사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모습과 하가의 어른으로서 집안 경영을 책임지는 할머니 김돈이의 모습 그리고 권위 있고 고을 사람들에게 존중받고 그들과 소통하는 할아버지 이문건의
이문건 - 『묵재일기』 『묵재일기(?齋日記) 는 묵재 이문건이 1535년부터 1567년까지 32년에 걸쳐 기술한 생활 일기이다. ... 그러나 1545년 조카 이휘가 처형되면서 가문의 정치적 부침이 시작되었고, 이문건 역시 자신의 정치적 의지와는 무관하게 중앙관료로서의 생활을 종료하게 되었다. 1545년 이후 이문건은 ... 이문건은 1494년 이윤탁의 3男으로 태어났고, 字는 子發, 호는 ?齋?休?
위의 글에서 제사차례로 누님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문건의 집안은 윤회봉사의 원칙을 따르고 있었음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 위의 4 집안에서 이문건과 김녕의 집안은 철저한 윤회봉사를 지키고 있는데 이것은 『주자가례』에서 중시하는 장자중심의 종법질서와는 대립되는 것으로 『묵재일기』속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 한편 이문건과 김녕의 집안과 달리 유희춘의 집안은 윤회봉사를 하지 않았으며 이정회의 집안은 자식 간의 이해세기 후반~17세기 초반을 살았던 이정회와 17세기 전반기의 김녕의 집안에서도
영비에 남아 있는 한글의 모습과 이문건의 마음이 왜인지 아프게 다가온다. ... 아버지를 생각하는 이문건의 마음을 대변하듯, 한자 한자에서 정성과 따뜻함이 밀려오는 듯 하다. ... 반듯한 한글뿐만 아니라 이문건의 따스한 효심 또한 오늘날에는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다. 조선 시대보다 사람들은 더욱 똑똑해졌고, 국가는 발전했다.
살이 빠지고 안색은 창백해져, 바라보는 내 마음 절로 슬퍼지도다. 』 이문건이 손자의 이질증상을 자세히 묘사한 글이다. ... 조선 초 신흥사림의 김종직의 제자이자 고위 관료였던 이문건은 유가에서 배척당하는 무당굿에 대해 “할아버지의 정은 끝없어, 허망 된 말도 귀 기울였다.”는 것이다. ... 묵재일기에서 이문건은 손자의 이질에 사군자탕을 지어 계집종 돌금에게 복용하게 하여 젖으로 약기운을 전달하도록 했고 소감원을 잘게 잘라 죽물에 타서 먹였지만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이를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비석을 세운 이문건 공이 비석이 훼손되지 않도록 경고한 것이다. 이공의 부친 묘는 원래 태릉 자리에 있었다. ... 조선 중종 31년(1536)에 세운 이 비석은 이문건 공이 부친인 이윤탁(李允濯)의 묘를 모친의 묘와 합장하면서 세운 묘비이다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보물 1524호로 지정됐으며
유희춘의 『미암일기』와 오희문의 『쇄미록』, 그리고 이문건의 『묵재일기』는 모두 양반들이 남긴 자신들의 일기이다. ... ‘묵재일기’를 통해 본 물물교환 묵재일기는 이문건이 41세 때 부터 사망하기 수개월 전까지 자신의 생활을 기록한 일기이다. ... 이는 흉년으로 인해 쌀이 2월 25일 이문건 가는 마조장으로부터 粉筒(분통) 2개를 사고 대가로 청어 11두름을 지불한다. 1546년 4월 19일에는 놋쇠그릇을 유근으로부터 사고
이문건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외로웠는지를 설명함으로 써 이문건이 왜 이렇게 손자의 육아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독자의 이해를 도와준다. ... 마지막으로 내가 또 울었던 부분은 이문건의 아내가 죽었을 때였다. 살아생전 부모와 형제, 그것도 모자라 자식까지 모두 앞세웠던 이문건이었다. ... 이문건의 삶이 너무나 기구해서 내가 다 마음이 아팠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마음고생이 심했을 이문건은 아내의 장사를 치른 그날 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의 곁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