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1589년(선조 22) 선전관과 정읍(井邑) 현감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유성룡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 그는 역적의 집안에서 태어나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변방에서 무관으로 생활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서해 유성룡의 천거로 인한 임진왜란을 결정적으로 막아내 불세출의 성웅으로 아직도
얼마 전 유성룡의 ‘징비록’을 다시 읽은 탓에 내친 김에 이순신의 ‘난중일기’까지 펼쳐들었다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 유성룡의 혜안은 놀랍다. 그는 다시는 전쟁의 비극을 당하지 않도록 ‘징비록’을 남겨 후세에 참고하도록 했다. 그러므로 그의 ‘징비록’은 의도적이다.
휴전회담 동안 우리나라는 다시 일본이 쳐들어올 것을 대비하기 위해 유성룡의 건의로 훈련도감을 설치하였다. ... 10월 10일에 육로로 침입하는 일본을 김시민 장군은 진주대첩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2월 25일에는 명의 원군 파병되어 조·명 연합군이 결성되어 힘을 합쳐 1593년 1월 8일 유성룡의
징비록 저자: 류성룡 징비록에서 류성룡은 “에 이르기를, “나는 지난 일을 경계하여 앞으로 후환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을 지은 까닭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이 책을 풀어쓴 이 또한 이 책을 “역사의 통절한 실패를 경험한 옛사람이 그 ..
특히 유성룡은 이순신 장군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은인이었다. 자기 주위에 자기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위기의 순간에 천군만마와 같은 힘이 되는 것이다. ... 그러나 그런 위기 가운데서도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유성룡, 권율, 조헌, 이원익 같이 자기의 불이익을 무릅쓰고 그를 적극 지원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징 비 록 > 징비록은 당시 조선 최고의 유학자이며 오늘날 국무총리와 같은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이 임진왜란 당시의 경험한 내용을 저술한 기록이다. 징비록의 역사적 가치는 같은 전란의 시기를 기록한 난중일기 못지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한 국가의 최고위직으로서 임진왜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