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백년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1867년 경복궁 중수(重修)공사에 부역 온 강원도 장정들이 '아라리'를 불렀고, 명성왕 후는 소리꾼들을 궁중으로 불러 '아리랑타령'을 ... 극장을 경영하여 부유했던 이 집에서 난영은 생전 처음 축음기를 보았다. 천부적으로 노래를 좋아했던 난영은 귀동냥으로 듣곤 축음기 소리를 그대로 흉내내 흥얼거렸다. ... 이 과정에서 아리랑은 고난과 역경을 함께 한 동반자로서 생채기난 가 슴을, 움추려든 어깨를, 힘겨워 굽은 허리를 어루만지고 쓰다듬어 고난의 고개를 넘게 해 주었다.
박자청은 경복궁에 있는 경희루를 건축한 사람이기도 하다. ... 하지만 생전의 위엄을 과시라도 하듯 왕의 무덤인 왕릉만큼은 그 규모가 다른 무덤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크다. ... 얼핏 들어서는 유학자들이 도교적인 성향이 짙은 풍수지리에 대해 흥미가 없었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하지만 실로 우리나라의 궁전이라는 경복궁도 그 규모가 외국의 궁전들과는 판이하게 달라서 실망한 것이 사실이었다. ... 그러나 석굴암은 김대성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여 그 조영사업은 국가가 마침내 완성시켰다고 한다. ... 요네다는 석굴 조영계획을 찾아가는 작업을 조성 당시의 통일신라의 제작자가 사용했을 자(尺)의 길이를 밝히는 데서 시작하였다.
고등보통학교령에 따라 이제껏 3년이던 중앙학교의 수업연한이 4년으로 늘어나 학교시설 확충은 시급한 과제가 되어 있었고 경복궁 자리에는 조선총독부청사가 터를 잡아 신축공사를 시작한 지 ... 생전은 물론 유명을 달리한 지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까지 정치가·교육자·사업가로서 추앙받을 수 있는 인촌의 굵직굵직한 경력과 업적들이다. ... 정치적으로 대한민국 탄생의 산파역을 맡은 뒤 제2대 부통령을 지냈으며, 교육 및 사업자로서 고려대와 동아일보, 경성방직의 창립자다.